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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예수의 날에 도달하여 예수를 덧입어라

류현수

빌 2:1~2:11 본문보기

내용

서론
‘말 타고 달리기를 사랑하는’이라는 뜻을 가진 빌립보서는 <무엇을 위해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라고 하는 질문을 던진다.
1장에서 6절이나 10절은 개인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날에 도달하기를 소망하라고 하는 주제를 던진다.
그리고 12절부터는 기독도의 열망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그 열망의 핵심에 자신이 살아서 전파하는 방법과 자신이 죽어지고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사는 것이 더 유익함을 말한다.
그러나 1장에서는 삶과 죽음의 차이에서 2중적 잣대가 있다.
그 잣대의 하나는, 영은 죽어있는 상태에서 타인과 다투며 전파하는 자기가 산 것과, 둘째는 자신의 육적인 영이 죽음으로 예수그리스도가 자신과 하나 되어 영이 참 영답게 살아있는 삶이이다.

여기에서 27-28절은 육적인 영으로 하나님을 전파하는 자들은 일심이 아니며 하나가 아니라고 하면서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는 그 자체에 대한 정의를 멸망상태에 있는 즉 죽은 자라는 증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바라는 바 모두가 일심으로 하나가 되어있는 상태에서 대적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 상태를 구원받은 것으로 이때에야 말로 하나님께로서 난 방법의 전파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구원받은 상태와 하나님께로서 나온 전파를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달게 받는 것에서 기인한다 하고 있다.
‘그러므로’라고 하는 접속사로 시작하는 본문 2장의 말씀에 그 고난의 의미가 나온다.
자신을 죽기까지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그 고난을 달게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 된 상태 즉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도달한 그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준비하신 보답이 있다.


본론

본문을 나누어 본다면
1-5절은 자신이 죽지는 못했지만 권면이나 사랑이나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5절에서, 그 시작에 접속사인 ‘가르’가 있다. 이는 앞에 있는 4절과 5절이 하나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 마음’이 ‘프호로베이스도’로 ‘마음’이 아니라 ‘심적 훈련, 감정이나 의견’이라는 뜻이다.
‘너희(쉬)’는 복수 같지만 단수 2인칭으로 ‘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문제에서는 ‘바로 당신’ 하나였다.
그리고 <예수의 마음이니>에서 ‘마음’은 ‘호스’로 ‘누구같이’로 관사, 대명사, 목적격이다.
‘곧’으로 번역된 ‘카이’는 하나에 하나를 더하는 축적의 의미이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가 주제인 이 문장은 <너에게 예수그리스도 하나를 더하여>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5절의 전체적인 원 문장이,
<그러므로 네 안에 있는 감정을 훈련하라 이는 누구를 더하는 것이니 곧 그리스도예수니라>
라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빌립보서가 말하는 자신 안에 하나 더 축적해야 할 그리스도 예수는 자신의 감정을 훈련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빌립보서가 말하는 믿음이 되기 전의 믿음상태가 있다.
로마서가 말하는 인간주의적인 선악을 바탕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죄인!
로마서를 이해하고 고린도서가 말하는 심령성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죄인!!
고린도서의 마음에 지어질 성전을 이해하고 갈라디아서가 정의한 육신의 복을 구하는 것을 버리고 심령에서 성령의 열매를 추구하는 법을 아는 죄인,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마음속에서 하고자 하는 행동적 생각에서 하나님이 들으시는 말과 이해를 인식하고 에베소의 뜻인 인내를 바로 알게 된 죄인,
그 인내의 목적을 이해 한 자에게만 그리스도 예수가 되기 위한 말타고 달리는 달음박질을 시작하여 버려야 할 굳센 것이라는 뜻을 가진 골로새서가 말하는 우상숭배인 성품에서 존재하는 자기 욕심을 버리러 가는 신앙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몸이란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아닌 타인을 위한 복종이라는 낮은 자리까지 내려감을 말한다.
로마서 10장에 7절에 <음부에 내려가지 말라 하니 이는 십자가에서 죽신 예수를 끌어올리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그 표현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려가셨다 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삶의 모든 일에서 자기의 감정이나 의견들을 죽이고 타인의 요구에 복종할 수 있는 것을 알고 행하는 그런 자들에게만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뛰어난 이름과 그 예수그리스도가 된 사람에게 무릎을 꿇게 하신다고 하셨다.

9-11절의 말씀은 마태복음 5장 16절이나 배드로전서 2장 11-12절의 말씀과 일맥 상통한다.
옳은 행실이라는 빛을 비추는 자를 보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나 비난하는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자기를 완성시켜 나갈 때에 하나님이 그 진실성을 보시고 또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시는 그날에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약속의 말씀, 그 약속의 말씀과 같이 그 모든 것이 이루어져 성품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발견 되는 그날,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까지 모두가 그 자신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지금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그 마음에 세워진 심령교회는 로마교회라도 되었는가?
그 심령교회 안에 70억을 대하는 각각의 자기 인격들을 사람으로 여겨 그 하나하나를 그 심령교회로 끌고 들어가 제물로 죽여 하나님께 제사하고 있는가?

한문의 아닐 未자와 끝 末자의 차이는 <아직 이루지 못한 십자가의 죽음을 이루면 가장 끝자리로 내려간다>라는 뜻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끝이 인생의 목적을 이룬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새롭게 되기 위해’라는 뜻을 가진 ‘돌이킬 返’자나 ‘자신을 낮추는 자리로 내려가다’ 라는 주석의 뜻을 가진 ‘나갈 進’자, 陸通이라는 주석에 ‘죽는다’라는 뜻을 가진 ‘여섯 六’자 역시도 모두 십자가에 죽는 죽음이 마음이 천국으로 가기위한 길들을 통과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결론

마귀에게 미혹되어 자기중심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을 타인을 위해 자기를 죽이는 사랑을 품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고 그 행실마저도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낼 수 있기까지 자라가야 하는 신앙성장의 길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근본은 육체가 가진 인간적 감정이 마음에 있는 상태에서(순간적인 배제가 아닌 그 속에 전혀 그 감정이 없어지지 아니한) 인간적 방법들을 통해 가르치려 하면서 하나님을 전파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이다.

신의 성품으로 변화 받기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셨다는 것을 믿는가?
그 성품의 변화는 감정이나 기분 또 타인을 주장하고 싶어 하는 의견을 내고 싶어 하거나 자기의 의견대로 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것이라는 이해하라.
그리고 사람의 감정을 지배하는 자아와 감정의 지배를 받는 그 차이는 그 감정을 조절하려 하는 것과 그 감정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그 감정의 의미들을 찾기 위한 것의 차이라는 것도 이해하라.

그렇게 자신의 감정이나 타인을 주장하고 싶어 하는 의견들을 들여다보고 발견 할 수 있게 되는 신앙을 자신의 영에 예수그리스도 하나를 더 한 것이라고 하는 빌립보서 말하는 예수그리스도의 날을 이루기 위해 자기의 감정이나 의견들을 죽이기 위한 낮은 자리로 내려가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위해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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