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art mission! Happy change!

GOODTV 메세지

전체메뉴
이전
오늘의 말씀
 

야곱의 꿈 ①: 도망자 야곱을 찾아오신 하나님

심양섭

창 28:10~28:22 본문보기

내용

Ⅰ. 야곱은 누구이며 왜 여행길에 올랐나?
야곱은 제가 성경인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입니다. 야곱은 모세나 요셉이나 다니엘과 같은 탁월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매우 연약한 인물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러기에 제게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도 야곱처럼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를 제일 좋아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과 믿음의 권능을 보여 주기 위한 예로 신약성경에도 등장합니다(롬9:13; 히11:9, 21).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야곱이 살았던 시대는 기원전 이천 년대 말엽입니다. 야곱은 온유하고 평화롭게 집에서 목자의 삶을 살았으나 에서는 거칠고 사나웠으며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으며 야곱은 형이 없는 사이에 몰래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고 형의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 메소포타미아의 하란(혹은 밧단아람)으로 도망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의 열두 개 소선지서 중 하나인 호세아서는 기원전 8세기 작품인데 이 호세아서에도 그와 같은 야곱의 삶이 (다소 부정적으로) 소개됩니다. 호세아서의 독자들이 자기들의 성조(聖祖) 야곱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3.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12. 야곱이 아람의 들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아내를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아내를 얻기 위하여 양을 쳤고(호12:3-4, 12)

야곱은 지금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고 있습니다. 장장 900킬로미터에 달하는 긴 여정입니다. 한반도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는데 야곱의 여정은 2250리입니다. 야곱의 이러한 여정은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여정과 정반대입니다. 야곱이 이러한 대장정의 여행길에 나서게 된 이유는 오늘 본문의 바로 전 장인 27장에 잘 나옵니다. 야곱은 표면적으로는 가나안 여자를 아내로 삼지 않고 외가에 가서 신부감을 찾기 위해 여행길에 나선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형 에서가 무서워서 도망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은 도망자입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 에서에게 가야 할 장자의 축복을 빼앗은 후에 형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얼른 친정으로 대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27:41-46).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먼저 찾아오시는 은총의 하나님입니다. 둘째,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셋째, 구원의 사닥다리가 되어주신 하나님입니다.

Ⅱ. 도망자 야곱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세 가지 성품
1) 먼저 찾아오신 은총의 하나님
야곱은 형 에서의 배고픔을 이용하여 장자권을 빼앗고, 어머니와 짜고 아버지 이삭을 속임으로써 형 에서에 가야 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이것은 아버지만 속이고 불효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야곱은 그런 비열한 짓을 하지 않더라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계보를 이을 사람, 그리고 오실 메시아의 계보에 오를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에 이미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용입니다(창25:23). 그런데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것입니다. 야곱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였던 사람입니다. 아주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위험하기까지 한 생각이죠. 야곱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가 여러 차례 약속의 복을 누리기 위해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기다리지 않고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쓴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은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는 야곱”(창35:1, 7)입니다. 그런 죄와 잘못을 범하고 도망치는 야곱이지만 그 야곱을 하나님은 꿈을 통해 찾아오셨습니다. 야곱은 지금 들판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형 에서라면 들판에 홀로 자더라도 안 무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처럼 털도 없고 얼굴도 하얀 샌님 야곱이 광야에서 홀로 자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당시 사회의 규칙은 길가는 나그네를 친절히 접대하는 것이었는데도 야곱이 마을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형 에서가 뒤쫓아 와서 마을을 뒤지면 어떻게 하나, 혹은 자신에 대한 나쁜 소문이 지역사회에 널리 퍼져서 문전박대당하거나 조롱당하지는 않을까 염려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 야곱이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야곱이 고난 중에 하나님을 먼저 찾고 도와달라고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하나님은 야곱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꿈에 나타나셔서 함께 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입니다. 야곱은 나중에 성공하여 귀향한 다음에 다시 한 번 “벧엘에 가서 제단을 쌓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이 때 야곱이 한 말을 보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은 야곱을 보호해주신 하나님이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창35:3)

“환난 날에 함께 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가 고난을 당할 때에 외면하시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무려 20년 동안이나 데릴사위로서 온갖 고생을 다하였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알고 계셨으니,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창31:12)고 하십니다. 물론 창세기 35장에서의 야곱의 이 같은 깨달음이 28장의 야곱에게도 있었는지는 불명확합니다. 아마도 벧엘 사건 당시에는 확신을 못 가졌을 것입니다. 32장의 브니엘 얍복 강가 사건을 겪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훗날 야곱은 사닥다리 꿈을 회고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 사는 자신의 백성에게 모든 것을 제공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사백년간 노예생활하면서 고통을 겪은 것도 알고 계셨고(출3:7),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을 헤맬 때에도 하나님은 늘 함께 하셨습니다(신2:7).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우리들 중에 지금 인생의 고난 가운데 놓여 있는 분이 계십니까? 바로 지금이 하나님 만날 때임을 믿읍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임을 믿읍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난을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다는 것을 믿읍시다.
1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야곱 곁에 계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16절에서 야곱은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이라고 말하고 있고, 이는 하나님이 하늘이 아니라 땅에 계셨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18절의 “기둥”은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합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이 기둥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념하는 것으로 삼습니다. 19절의 “벧엘”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집(v. 22)이라는 뜻입니다. 벧엘은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중요한 성소였습니다(창12:8). 일찍이 야곱의 조부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하나님에게서 축복의 약속을 받고 제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곳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창세기 28장에서 아직 제단을 쌓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아직은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 후 이십 년이 경과하고 나서 야곱은 창세기 32장에서 자신의 믿음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는 브니엘 얍복 강가에서의 하나님과의 대면(씨름)을 거친 후 35장에서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습니다(1-7절). 야곱의 진정한 믿음은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데 불과합니다.

2)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14절에서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창세기 12장(3절과 7절)과 13장(14-16절), 15장(5절), 17장(7-8절), 18장(18절), 22장(17-18절)에서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26장에서 이삭에게 내린 복을 되풀이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반복하신 약속의 구체적 내용은 땅, 자손, 복의 근원, 보호, 인도, 귀향, 함께 하심(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버리지 않을 것이고, 이 모든 약속을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그러한 복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복입니다.
이 약속은 결국 이루어졌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였지만 끝내 성공하여 금의환향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고생하는 야곱을 번영하게 하고 그 노고의 결실이 불어나게 하였던 것입니다(지혜서 10:10). 어디 그뿐입니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바로 야곱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고, 자신이 맹세하신 것을 또한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창 18:19; 26:3). 15절 말씀을 다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28:15)

이 15절의 한글 번역에서는 “내가”라는 구절이 두 번밖에 안 보이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여섯 번이나 하나님이 “내가”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틀림없이 지킬 것이라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 15절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첫째, 자기 자녀와 함께 하시며 떠나지 아니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입니다. 둘째, 자기 자녀를 지켜주시는 보호의 하나님입니다. 셋째, 자기 자녀를 이끄시는 인도의 하나님이십니다. 넷째, 나그네 길에 있는 자기 자녀로 하여금 고향 땅에 돌아오게 하는 회복의 하나님입니다. 다섯째, 말씀하신 것을 다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에 대하여 야곱은 조건부로 서원합니다(vv.20-22). 그가 아직은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관련하여 이중적(ambivalent) 태도를 견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절에서 돌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부었으나 아직 제단을 쌓지는 않았던 것의 연장선상입니다. 야곱이 여호와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또 한 번의 개인적인 만남(32:22-32)이 필요한 것입니다.

3) 구원의 사닥다리가 되어주신 하나님
야곱이 광야에서 하룻밤을 묵는데 꿈을 꿉니다. 꿈의 초점은 사닥다리입니다. 12절에 나오는 ‘사닥다리’는 ‘층계(계단)’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닥다리의 모양이 아니라 사닥다리의 목적입니다. 이 층계는 하늘과 땅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장해주는 요소입니다.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즉 천국 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닥다리입니다.
사닥다리는 또한 하나님이 여전히 땅을 자신이 거할 처소로 삼으려고 애쓰고 계심을 말해줍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에서 보듯이 인간은 하늘로 올라가고 싶어 하는 반면에, 하나님은 땅을 자신의 성전이 있는 도성(temple-city)으로 만드시는 데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은 하나님이 파견한 존재들, 즉 천사들입니다. 천사의 출현은 인간의 세계에 하나님이 개입하심을 상징합니다. 12절에서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에 닿았고 천사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여기서의 ‘사닥다리’는 신약의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1:51)

하나님이 인간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사닥다리가 되어 주셨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하나로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Ⅲ. 모태신앙에서 자기 신앙으로
야곱은 오늘 본문에서 신앙 면에서나 사회생활 면에서나 홀로서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엄마의 치마폭에서 벗어나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신앙 면에서도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신앙을 물려받았으나 자기 신앙은 아니었는데 이제 처음으로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습니다. 모태신앙에서 벗어나 자기 신앙을 가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직 자기 신앙이 확립되지는 않았습니다. 창세기 32장에서 브니엘 얍복 강가에서 비로소 야곱은 자기 신앙을 갖게 됩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서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영적으로는 홀로서기에 성공한 것이죠. 몸이 성해도 천국에 못 들어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삼손의 최후에서 보듯이 몸의 일부가 상하더라도, 아니 죽음에 처하더라도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거듭나고 새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역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죽었고 그의 아내 둘은 시기와 질투로 그의 삶을 힘들게 하였으며 디나와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 같은 그의 자식들도 그를 슬픔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사랑하는 라헬과 아버지가 죽었고 사랑하는 아들 요셉은 들짐승에게 잡혀 죽었으며 베냐민을 잃는다는 생각에 그는 무덤에까지 슬픔을 지고 갈 형편이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이집트의 바로 앞에서 그의 나이가 얼마 못되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의 삶에 역경이 많았음을 뜻합니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그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는 야곱의 죄들로 인한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를 보며, 동시에 점차로 그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을 묵상하면서 제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한국 나이로 마흔 두 살 때였습니다. 저의 영적 고향인 미국 시애틀에서였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에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비로소 전적 헌신의 제자도로 들어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야곱을 묵상하면서 제 아들 재현이가 생각났습니다. 이제 막 모태신앙에서 벗어나 자기 신앙을 갖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몸살을 앓고 때로는 일탈과 저항의 몸짓까지도 보이고 있습니다. 야곱이 처음에는 꿈에 하나님을 만나고(28장), 다음에는 꿈에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는 경험(32장)을 통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듯이, 제 아들 재현이도 그러한 믿음의 여정을 뚜벅뚜벅 잘 걸어가기를 소망해 봅니다. 야곱의 벧엘 사건을 읽으면서 우리 모두가 과연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GOODTV Corporatio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