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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거룩한 하나님

김영준 기쁜소식교회

출애굽기 20:1-20:17 본문보기

내용

◈ 설교말씀

우리가 추석연휴로 인해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끄고 있을 때 세계적으로 지각변동을 일으킬만한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프란시스 교황이 교회가 낙태와 동성연애 문제에 집착하는 것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발언을 한 것입니다. 교황이 말하기를 ‘교회는 세상 사람들을 널리 포용하는 큰 장막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작은 채플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야전병원과 같아서 세상에서 상처 입고 오는 사람들을 치료하고 위로하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오늘날의 교회는 환자들의 콜레스테롤 수치, 혈당수치나 따지고 있는 곳이 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프란시스 교황이 말한 것이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개신교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부가 먼저 고기를 잡은 다음에 그 고기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고기를 잡기도 전에 깨끗하게 할 수 없는데 교회가 먼저 사람을 잡고 그리고 그들을 가르쳐야지 그러기도 전에 그들이 어떤 사람이냐를 따지게 되면 도대체 사람을 낚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론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주의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는 복음주의가 날이 갈수록 배타적이고 독선적이고, 신앙에 속한 것과 정치에 속한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마다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후보자들에게 물어보는 것은 딱 두 가지입니다: ‘낙태에 대한 당신의 입장이 무엇이냐? 동성연애에 대한 당신의 입장이 무엇이냐?’ 이 두 가지를 기준으로 어떤 후보를 지지할 것인가를 결정하려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신앙적으로도 미련한 것이고 정치적으로도 미련한 것입니다. 정치인의 자질을 이 두 가지만 가지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관심사는 이 두 가지보다도 훨씬 더 많고 다양한데 지엽적인 이슈를 정치적 이슈로 비화시키는 것은 사회 갈등과 분열만을 초래할 뿐더러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멀리 밀어내는 결과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개신교가 용기가 없어 하지 못하는 말을 가톨릭 교황이 말했다는 것은 21세기 종교의 주도권을 가톨릭이 차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봅니다. 개신교는 원래 종교개혁에 의해서 탄생했지만, 개혁의 의지를 잃어버린 지 오래고 누구보다 독선적이고 보수적인 단체가 돼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몇 달 전에 페이스 북에 한 글을 올렸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생각하고 묵상한 내용이었습니다. 인간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에 대한 글입니다.
원시시대에는 인간의 영역이라는 것은 거의 없고 모든 것이 종교적인 영역이었습니다. 먼저 자연이 종교의 영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람이 불면 하나님의 입김이고, 비가 오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고, 비가 오지 않으면 하나님이 진노한 것이고, 천둥이 치면 하나님이 화를 내시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하나님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발달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느냐? 아니에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오해로부터 자유해지고 자연을 인간이 조절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자연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고 옛날에는 정치의 영역과 종교의 영역이 일치했습니다.
왕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왕의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왕을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그렇게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위정자의 권세는 국민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국민의 선택에서 정치적인 권세가 비롯됩니다. 어느 누구도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세를 잡은 자가 없습니다. 민심이 천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런 변화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느냐?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빙자한 폭정, 권력의 남용으로부터 자유해지게 만들고 인간이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자치, 자율, 그리고 자유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인류가 발전할 때마다 하나님의 영역, 전통적인 신앙관에 도전을 제기했지만 그것이 신앙을 위협한 게 아니고 오히려 신앙이 더 성숙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신앙이 본질적인 것을 재정의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마음속에 이런 질문을 가지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하나님의 영역이 점점 줄어들지 않을까? 이대로 가다가는 하나님의 영역이 없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에요. 만일 인간이 발전함으로 하나님의 영역이 줄어든다면 그건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역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부러 인간을 미개하게 남겨놓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건 마귀의 시험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아직 많은 발전의 가능성이 있고 많은 성숙의 여지가 남아있습니다. 그것만은 분명한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마음속에 또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어떤 영역이 도전을 받고 어떤 영역에 변동이 일어날 것이냐? 자연, 정치에 이어서 다음엔 어떤 영역이 종교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냐? 윤리와 도덕이 그 변혁의 현장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미 2,000년 전에 예수께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한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 근거를 마련하신 면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사람이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이 득을 보는 게 아니고 그것이 인간에게 득이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도덕적으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혜택이 되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 자신이 혜택을 입고, 사회가 혜택을 입고, 이웃이 혜택을 입고, 세상이 더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인간이 완전하다면 스스로 선을 행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 말씀드릴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시내 광야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유명한 십계명이 출애굽기 20장에 소개됩니다.

영화 <십계>를 기억하십니까? 십계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장면이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이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내리시는 장면, 또 하나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장면, 그리고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는 장면이 컴퓨터 그래픽이 없었던 시대에 정말로 스펙터클하게 제작됐습니다.

하나님이 돌 판에 십계명을 새기셨다고 했는데, 저는 늘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어떤 언어로 새기셨을까, 그리고 모세가 그것을 읽을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문자가 그렇게 활성화 되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성경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지요.

그것보다도 더 궁금한 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기 이전까지는 인류가 이러한 법규를 몰랐을까? 하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살인이 죄라는 사실을 인류가 몰랐을까?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에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이미 가인은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적질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기 전까지 인류는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을 몰랐을까?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유치원 애들도 아는 것이기 때문에.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기 전까지 인류는 마음껏 간음을 하면서 살았을까?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할 때 요셉이 ‘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요’라면서 그것을 피했기 때문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 인류는 효도의 가치를 몰랐을까?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멀리 있는 중국의 공자가 효도를 가르쳤기 때문에.
그럼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시기 전까지 인류는 그 계명을 몰랐을까?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베델로 올라갈 때 자기 식솔에게 우상을 버리라고 명한 것을 보면 벌써 옛날에 히브리 민족은 우상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돌 판에 십계명을 새겨주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
첫째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은 돌 판에 계명을 새기시기 전에 사람 마음 판에 계명을 새기셨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2장 14절에 바울이 말하기를 ‘이방인도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 인간의 본성, 인간의 양심에 이미 하나님이 계명을 코드로 유전자처럼 넣어주셔서 본능적으로 안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우리가 나쁜 짓을 하면 마음이 두근거리고 좋은 일을 하면 마음이 기쁘지 않습니까. 그 자체가 우리 마음속에 계명이 새겨져 있다는 얘기에요. 그러므로 아무도 ‘나는 계명을 몰라서 지키지 못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로 그럼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진지하게 지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편벽함,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심으로 옳고 그름을 확인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9절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인간이 편벽하고 죄악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명을 더하신 것입니다. 확인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집 대문 앞에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지만 버립니다. 그래서 주인이 ‘여기에 쓰레기 버리지 마시오.’라고 쓰면 사람들이 ‘아, 여기에 쓰레기를 버리라는 말이구나.’ 그래서 쓰레기가 더 많아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주인이 ‘CCTV 설치했음’ 그때 비로소 사람들이 안 버립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선하기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일이 나쁘기 때문에 안하는 것도 아니고 붙들릴까봐, 들킬까봐 안 하는 경우가 많아요. 제재를 하지 않으면 사람이 그 일을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편벽함이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범법함으로 인하여 더한 것이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국가가 제재를 하고 양심이 제재를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큰 효력이 없고 그래서 하나님이 제재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국가의 제재는 피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제재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우리 양심에 새긴 양심 양심에 새긴 율법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돌 판에 계명을 새기심으로 구속력을 더하신 것입니다. 강제력을 더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로 그럼에도 그것이 인간을 의롭게 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선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벌을 피하려고, 하나님이 무서워서 계명을 지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속도로에 구간마다 과속탐지기가 설치돼 있지요. 사실은 과속탐지기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냥 ‘속도제한 100킬로’ 그것만 가지고 사람들이 지켜야 정상인데 안 지키기 때문에 곳곳에 과속탐지기를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운전자들이 어디에 과속탐지기가 설치됐는지 다 압니다. 내비게이션이 다 알려줍니다. ‘500 미터 앞에 과속탐지기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법이에요. 그 대신 뭐라고 말하는지 아세요? ‘500미터 앞에서 시속 100킬로로 안전운행 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합법인 거예요.
이것이 인간의 편벽함이에요. 사람들이 그 구간에서 속도를 줄이지만 그건 안전운행을 기원하기 때문이 아니고 찍힐까봐 그러는 것입니다. 벌점을 피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도 마찬가지입니다. 벌을 받지 않으려고 하나님에게 걸리지 않기 위하여,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하여 악을 피한다면 그것이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것입니까? 아니에요. 그건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게 아니고 영리하게 만드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인간을 만드셨을 때에는 인간이 성숙한 존재가 되기를 기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하고 지식이 많아져도 인간은 성숙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민주주의가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은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이 동산을 지나시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지요. 그리고 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최초의 인간 아담뿐만이 아니고 그 이후의 모든 시대, 모든 곳에 사는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헐벗음을 깨닫고 그것을 감추려고 합니다. 인간의 업적, 인간의 소유, 지식, 인간의 명성, 이런 모든 것은 그것을 가지면 나의 벌거벗음을 감출 수 있을까 하여 사람이 만든 것인데 그것이 사람을 의롭게 만들지 못하고 선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히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입니다.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됩니다. 우리의 벌거벗음, 우리의 불의함을 덮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에요.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공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의로워질까 기대하셨지만 인간은 양심에 새긴 율법도 지키려고 하지 않고 돌 판에 새긴 율법도 지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키는 척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느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숙한 인간이요, 완전한 인간이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라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의 반장이라는 뜻과 같습니다. 반장이 급우들을 대표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대표하십니다. 완전한 인간, 의로운 분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표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우리를 대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의미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는 의미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는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영역이 넓어져도 예수님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나 혼자 못 서리. 힘없고 부족하며 지혜도 없으니, 내 주는 나의 생명 또 나의 힘이라, 주님을 의지하여 지혜를 얻으리’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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