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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칠언: 만족의 말씀

심양섭

눅 23:46~23:46 본문보기

내용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마디 말씀을 가상칠언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맨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 설교의 본문입니다.
가상칠언을 차례대로 한 번 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아버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눅 23:34). 그리고 자신의 좌우에 달려 있던 두 명의 강도 중에서 한 명이 구원을 요청하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십자가 곁에 있던 어머니 마리아에게 열두 제자 중 유일하게 십자가 곁을 함께 지켰던 제자 요한이 앞으로 자신을 대신하여 아들 노릇을 하며 어머니를 모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9:26-27). 네 번째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며 성부 하나님에게 잠시나마 버림받는 슬픔과 고뇌를 표현하셨습니다(마27:46; 막15:34). 다섯 번째로는 “내가 목마르다”며 인류 구원을 위해 자신이 십자가상에서 겪는 고난을 그대로 표현하셨습니다(요 19:28). 여섯 번째로는 “다 이루었다”는 승리의 감격을 외치셨습니다(요 19:30).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눅 23:46).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을 다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눅 23:46)

예수님이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신 이유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세 번 성부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가상일언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면서 불렀고, 가상사언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면서 불렀으며, 마지막으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면서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두 번은 “아버지”라고 불렀고, 한 번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성자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을 부르는 매우 친근한 호칭이라면, “나의 하나님”은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객관적인 호칭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호칭 변화는 십자가상에 계셨던 여섯 시간 동안에 아버지와의 교제가 중간에 단절되었다가 회복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제일 미워하시기 때문에 비록 자신의 독생자라고 하더라도 죄를 짊어진 상태에서는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번 성부 하나님을 부르면서 처음에는 그냥 부르셨지만(“예수께서 이르시되”, 눅 23:34), 뒤에 두 번은 크게 부르셨습니다. 가상사언에는 “크게 소리 질러”(마 27:46) 혹은 “크게 소리 지르시되”(막 15:34)라고 묘사되어 있고, 마지막 말씀에는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눅 23:46)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부르실 때는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용히 말씀하셔도 되었지만, 뒤의 두 번은 크게 외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선 가상사언에서는 자신이 인류 구원을 위해 성부 하나님에게 버림받는다는 사실을 만방에 외칠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인류 구원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는 사실과 성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뢰와 확신을 선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하신 이 마지막 말씀은 운명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십자가상에서가 아니라 병석에서도 죽기 직전에는 대개 말 자체를 못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여섯 시간 동안 달려 계시고도 “큰 소리로”로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잡히시던 순간부터 따지면 열두 시간 이상을 심문 당하고 매맞고 피흘리시며 수난당했습니다. 그러고도 “큰 소리로”로 부르실 기운이 있었습니다. 이를 『가상칠언 그 의미와 적용』의 저자인 아더 W. 핑크는 “죽음으로 정복될 수 없는 완전한 주인께서 지칠 줄 모르는 힘으로 크게 외치”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생사여탈권을 가지신 주님으로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요 10:17-18)

예수님은 가상사언에서 인류 구원을 위해 자신이 아버지에게 버림받는다는 사실을 선포하셨듯이, 마지막 일곱 번째 말씀에서는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서 받아주신다는 신뢰와 확신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의 의미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에서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잡하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셨던 기도에서부터 십자가상에서 네 번째로 하신 탄식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온갖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을 다 겪으셨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잠시나마 단절되는 데서 오는 고통이 가장 컸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고통을 견뎌내고 마침내 승리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 그가 아버지에게 받은 사명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상의 마지막 말씀에서 사용하신 “아버지”라는 호칭에는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느끼는 친밀감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흔히 아이들은 장소 여하를 막론하고 큰 소리로 “아빠”를 외치는데 그것은 언제 어디서 그렇게 부르더라도 아버지가 자기 말을 들어주고, 자기를 품에 안아주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사 주고, 자기가 바라는 것을 해 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간의 친밀감은 한국에서는 종종 목욕탕에서 서로 때를 밀어주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신뢰, 확신 그리고 친밀감을 예수님은 죽기 직전에 다시 온전히 회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라는 호칭을 처음 쓴 것은 열두 살 때입니다. 유월절 축제를 맞아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에 왔을 때 성전에 사흘 간이나 혼자 남아 있다가 뒤늦게 놀라서 돌아온 부모(특히 어머니)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눅 2:49)

예수님은 그 후에도 수없이 “아버지”를 말합니다. 그의 관심은 항상 아버지에게 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천국생활의 원리를 설파한 산상수훈(마 5-7장)에서는 열일곱 번이나 “아버지”를 말씀하셨고,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저녁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가르친 다락방 강화(요 14-16장)에서는 무려 마흔 여섯 번이나 “아버지”를 언급하셨으며, 그리스도의 위대한 대제사장의 기도(요 17장)에서도 여섯 번이나 “아버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기도하거나 찬양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곧 우리의 아버지이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곧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요 20:17)

구약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너무도 두려워서 감히 “여호와(스스로 계신 분)”라고 하지 못하고 그냥 “아도나이(주님)”라고 했습니다. 그토록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보통 특권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의 다음과 같은 감탄에서 그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요일 3:1)

여기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바로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내주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 덕분에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영혼이란 무엇인가? 왜 영혼이 중요한가?
예수님이 아버지 손에 맡긴(부탁한) 것은 자신의 영혼이었습니다. 육신도 중요하지만 육신은 영혼의 집에 불과합니다. 생명의 본질은 육신에 있지 않고 영혼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육신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수많은 시간과 돈과 정력을 쏟아부으면서 정작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별로 투자하지 않습니다.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서양의 금언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역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혼이 병든 사람은 육체를 아무리 꾸며도 진정한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은 미모가 조금 쳐지거나 건강에 다소의 문제가 있어도 자기 자신만의 미와 특유의 평온함과 기품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는 육과 영과 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그 중에서도 영과 혼, 즉 영혼이 중요합니다. 영혼은 첫째, 사람을 짐승과 구분해 줍니다. 둘째, 영혼은 인간과 하나님을 이어줍니다. 성도가 날마다 갖는 하나님과의 교제는 영적 교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나의 영이 말씀과 기도를 매개로 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혼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지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슥 12:1)

생명에는 육체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있고 둘 다 소중하지만 그 중에서도 핵심은 영혼입니다. 성경은 영혼 그 자체가 곧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그 두 사람(모세와 아론)이 엎드려 이르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spirits)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민 16:22)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하나님에게 갑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 12:7)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서도 영생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죽음으로 분리되었던 우리의 육신과 영혼이 재결합하면서 우리 모든 신자들은 신령한 몸으로 바뀝니다. 그것을 신학에서는 영화(榮化, glorificatiion)라고 합니다.

유일한 ‘안전한 포구(safe haven)’는 “아버지 손”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시편 31편 5절 말씀의 앞부분을 그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시 31:5)

예수님이 자신의 영혼을 부탁한(맡긴) 곳은 “아버지 손” 즉 “주의 손”입니다. 아버지의 손은 안식의 처소입니다. 사람들은 ‘안전한 포구(safe haven)’를 찾아 좋은 동네나 좋은 집으로 이사하기도 하고, 각종 보험에 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좋은 묫자리를 미리 잡아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완전히 ‘안전한 포구’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눈에 보이는 곳은 결코 안전한 포구일 수 없습니다. 다 한계가 뻔합니다. 유일하게 완전히 ‘안전한 포구’는 ‘아버지 손’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의 품’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으면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할 때 우리 모든 신자의 영혼도 함께 의탁하셨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이미 ‘아버지 손’에 맡겨졌습니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29)

우리 믿는 자들의 영혼은 벌써 아버지 손에 붙잡혀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을 때 우리의 믿음은 견고해지고 현실 삶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벧전 1:5)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을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 손’입니다. 우리에게 완전한 보호 즉 ‘안전한 포구’를 제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즉 ‘아버지의 손’밖에 없습니다. ‘아버지 손’에 한 번 붙들린 사람은 영원히 그 손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5-39)

어떤 유혹과 시험과 고난이 닥쳐와도 그리스도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버지 손’이 우리 믿는 자들로 하여금 견디어 이기게 해 줍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또는 ‘궁극적 구원(ultimate salvation)’이라고 합니다. 나의 열심이나 노력이 나의 구원을 이루는 게 아니고, ‘아버지 손’이 구원을 이루어 줍니다.

‘아버지 손’에 영혼을 맡기는 것이 왜 만족의 말씀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이 말씀을 『가상칠언 그 의미와 적용』의 저자인 아더 W. 핑크는 ‘만족의 말씀(the word of contentment)’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왜 만족의 말씀일까요?
첫째,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여한 사명을 다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곱 번째 말씀 바로 앞에 하신 말씀이 바로 다 이루었다는 승리의 선포였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 19:30)

둘째, 아들로서 아버지와 교제를 회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상사언에서 아버지와 관계가 단절된 슬픔과 고뇌를 토하였습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6; 막 15:34)

그러나 버리는 것이 얻는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의 고통 중에도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하였습니다. 마치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 안에서,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도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승리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의 영혼은 소생합니다. 영혼의 소생은 생명의 부활을 말합니다.
셋째, 십자가 사건 후 예수님의 존재와 위상을 보면 그것이 왜 ‘만족의 말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여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에베소서 1장 20-22절과 빌립보서 2장 9-11절이 그것을 가장 잘 말해줍니다: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엡 1:20-22)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9-11)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구속주(救贖主) 예수님이 이제 곧 재림주(再臨主)로 다시 오십니다: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 3:20-21)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은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사명을 다 이룬 다음에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만족의 말씀이고, 아들로서 아버지와 관계를 회복하였기 때문에 만족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 후 예수님의 존재와 위상이야말로 그 말이 만족의 말씀임을 증언합니다.

죽음은 두려워할 게 아니라 축하할 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죽음은 무엇일까요? 첫째, 사랑하는 분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 죽음은 아버지와 그리고 아들과 영원한 교제에 들어가는 것이고 영원한 안식을 얻는 것입니다. 반면에 불신자에게 있어 죽음은 무서운 심판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 10:31)

이처럼 불신자에게 있어 죽음은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 죽음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축하할 일입니다. 마치 졸업이 끝이 아니라 희망의 시작인 것과 같습니다. 영어에서는 졸업을 ‘commencement’라고 하는데 ‘commence’는 ‘시작하다’라는 뜻입니다.
둘째,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죽음은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6절이 그 점을 웅변합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6)

우리 믿는 자의 고향, 곧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집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천국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 3:20)

이 땅에서 우리가 사는 것은 나그네 혹은 여행자로 사는 것입니다. 탈북자나 결혼이주여성만이 이주자, 이민자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이 땅에서는 ‘이민자’ 즉 ‘외국인’으로 사는 겁니다. 본향인 천국에 가야 비로소 ‘내국인’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7절과 히브리서 11장 13절이 우리가 이 땅에서는 여행자(sojourner) 혹은 순례자(pilgrim)임을 잘 말해줍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 1;17)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히 11:13)

여행자가 너무 많은 짐을 가지고 있으면 불편하기만 합니다. 여행지에서 잘 먹고 잘 노는 것만 추구하지 않고 언젠가는 하게 될 귀향을 사모하는 것이 여행자의 바른 마음가짐입니다. 집 떠나면 고생 아닙니까? 크든 작든, 아주 좋든 좀 덜 좋든 간에 그래도 집이 좋고 편합니다. 우리 모두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의 집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의 보물은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첫째, 죽음은 보석함이 깨지는 것이지 보석이 깨지거나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보석함인 우리의 육신은 썩어 흙이 되지만 보석인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여, 보석함이 깨질 때 보석을 보호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런 기도였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에게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였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같은 기도를 합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59)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타인의 죽음에 조의를 표할 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하지 말고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하나님이 고인의 영혼을 받아주시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하시며 남은 가족의 앞날을 항상 은혜와 평강 중에 인도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보다 영혼 구원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먹고 살 만해지니까 너도나도 건강이 최고라고 합니다. 건강에 좋다면 못할 게 없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신의 건강보다 영혼의 건강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 4:8)

육신의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영혼의 건강 즉 구원(의 완성)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까지 예수님의 가상칠언을 함께 묵상하고 거기서 우리 삶에 필요한 교훈을 얻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상육언에서 다 이루었다는 승리의 선포를 하시고, 끝으로 당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시는 기도를 묵상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 완수하고, 우리의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기도를 하면서 죽음을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본향인 천국으로 가는 것을 사모하며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또한, 우리가 영적인 안목을 갖추어서 남북한의 많은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들 삶이 힘들 때마다 주님의 가상칠언을 되새기며 믿음으로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 도와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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