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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사명을 회복한 사람

박영재

요 21:1~21:19 본문보기

내용

리학자인 롤로 메이(Rollo May)는 그의 저서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 이란 유명한 책을 썼는데 그는 이 책에서 의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발달된 인류 문명 속에 현대인은 어느 때보다 가치있게 여겨지고 있지만 현대인은 쫓기듯이 일만 할뿐 정작 자기가 누구인지 뭐하는 사람인지를 몰라요. 자아를 잃었어요. 그래서 불행한 조건을 얻게 되었는데 첫째 인간은 늘 불안한 상태에 살게 되었다는 겁니다. 미래가 확실하게 보장된 것이 하나도 없어요. 사랑도, 건강도, 삶의 기반도, 심지어 생명조차도 보장된 것이 없어요. 그래서 불안해요. 어떤 사람은 불안한 심리가 커지자 일도 저질러요. 여기에 안타까움이 있어요. 여러분, 사람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불안이 증폭되요. 이럴 때 하나님을 깊이 믿으면 정신건강과 안정에 큰 도움이 되요. 여기에 신앙생활의 가치가 있어요. 두 번째 불행한 특징은 현대인은 고독 속에 살아요. 현대인은 만나는 사람이 많고 부딪치는 사람들이 많은데 오히려 외로워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좋은 평판을 받고 싶은데 쉽게 채워지질 않아요. 그래서 신경만 예민해져 있어요.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기독교는 사랑을 강조해요. 사랑이 가득한 마음을 가질 때 고독이 발붙일 틈이 없어요. 여기에 축복이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에 푹 젖어 행복한 사람, 풍성한 가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세번째는 현대인은 공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겁니다. 현대인은 나이가 들수록 마음이 공허해집니다. 이유가 뭔지 아세요? 열심히 앞으로 달려가긴 하는데 방향감각이 없어요.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어느 날 ‘이게 아닌데...’ 하고 깨닫게 되요. 목적 없이 달려왔음을 깨닫게 되고 후회하게 됩니다. 잘 먹고 열심히 일 하는 것이 잘사는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수단에만 충실했을 뿐 목적 없이 살았어요. 잘못 살았다는 느낌을 지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마음이 공허한 겁니다. 목적없이 살 때 공허한 겁니다. 그래서 롤로 메이는 마음의 공허감을 갖지 않기 위해 목적있는 삶을 살 것을 권유합니다. 목적있는 삶을 살면 공허함이 없어요. 오히려 성취감이 있어요. 가슴 뿌듯함이 생기고 아름다움이 찾아와요. 예수님은 목적 있는 삶을 사셨는데 아예 삶의 목적을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이를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나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분명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에 초점을 맞추셨어요. 목적과 상관이 없는 시간이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목적을 이루는데에 단순하고 강직하며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어요.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어요. 주님의 이 선명한 목적은 어디서 나왔느냐 바로 사명에서 나왔어요. 인류를 구원하라는 사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어요. 그리고 사명을 따라 사셨어요. 사명은 삶의 목적을 만듭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명은 삶의 목적을 만듭니다. 사도 바울도 한 평생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살았어요. 사명에 얼마나 투철한지 사명을 따라 산 그의 삶은 아름다웠고 성취감으로 충만했어요. 그가 사명의 길을 온전히 간 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에게는 달려갈 길, 사명이 있었습니다. 복음전하는 사명 주님께 받은 것이었습니다. 사명을 좇아 산 그의 삶은 이천년이 지나도록 찬란히 빛나며 눈부시도록 아름다웠어요. 사명을 좇아 살면 마음이 공허해지지 않아요. 여기에 축복이 있어요. 톨스토이가 지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답은 “사랑으로 산다”였습니다. 사랑으로 살아야 따뜻한 사회, 인간다운 삶이 이뤄진다는 것이지요. 옳은 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느냐 사명으로 삽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이유인 거예요. 70년대 후반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통치를 하고 있을 때에 한국유리의 최태섭장로님에 얽힌 얘기가 있습니다. 당시 수도교회에는 김상근 목사님이 목회를 하고 계셨는데 김목사님은 재야의 야전 사령관으로 반유신투쟁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은 최태섭 장로님을 불러 놓고 “김상근 목사를 교회에서 내보내시오. 만일 못한다면 한국유리를 접수하겠소.”하며 양자 택일을 요구했습니다. 최 장로님에게 한국유리는 분신이요, 자식과도 같았습니다. 한국유리가 당시 우리나라의 유리를 독점 생산하며 수입도 좋았습니다. 최 장로님은 한 달의 말미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한 달은 최 장로님에게는 가장 길고도 험난한 시간이었습니다. 목회자를 보필하라는 장로의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 아니면 그 사명 버리고 사업체를 선택할 것인가? 깊이 기도하였습니다. 약속된 한 달이 되어 최 장로님은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수도교회 선임 장로입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유신철폐를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알고 계시고, 저의 사명은 목사님을 잘 받들어 그분이 불편 없이 목회 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리는 일인데, 어찌 나의 안녕을 위해서 목사님을 나가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한국유리를 포기하겠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재산보다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랐습니다. 장로님의 이 강직한 사명감에 박대통령도 포기하고 말았지요. 여러분, 이것이 사명자의 모습입이다. 고난이 와도 피하지 아니하고 고통이 닥쳐도 멈추지 아니하는 하나님이 주신 길을 가는 것 바로 이것이 사명의 길입니다. 덴마크의 최고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온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내가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진리, 내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에겐 사명이예요. 사명을 좇아 살아야 하나님 앞에 갔을 때에 떳떳한 생이 되는 겁니다. 성경을 보세요. 어떤이는 복음 전하는 일로, 어떤이는 교회의 짐을 나눠지는 일로, 어떤이는 새 신자를 양육하는 일로, 어떤이는 주의 종들을 보살피는 일로, 어떤이는 성경을 가르치는 일로, 어떤 이는 복음의 불모지에 선교하는 일로 하나님께서 가슴에 거룩한 열정과 부담을 주시며 사명을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하 이것이 내 사명이로구나 하고 사명을 받아 사명을 좇아 살았습니다. 손님처럼 편안히 교회를 다니면 사명의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주신 손과 발, 주님이 주신 건강, 재산, 모든 환경등을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명을 감당하는 데에 쏟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갔을 때에 할 말이 있어요. 그래야 잘 사는 것입니다. 사명에 붙들려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명의 필요성-사명을 잃어버린 결과와 원인]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사명을 좇아 살다가 사명을 잃어버려요. 방황합니다. 사명의 큰 줄기를 좇다가 지엽적인 길로 빠져버려요.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사명을 따라 사는 빛나는 삶을 살다가도 사명을 버린 비참한 삶을 살기도 해요. 하나님은 삼손에게 자기 민족을 구원하고 백성을 보살피라는 사명을 주시며 능력도 주셨어요. 처음엔 삼손이 사명의 길을 잘 갔습니다. 괴력을 가지고 민족을 구원하는 일에 앞장섰고 그 때마다 백성들의 위로와 소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후에 이방 여자에 빠져 사명을 팽개쳤어요. 결국 적의 속임수에 넘어가 눈이 빠지고 힘을 잃고 소처럼 맷돌을 돌리는 적의 노리개가 됩니다. 빛나던 사명의 삶이 사명을 버리니 불행해졌어요. 사울왕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은 사울을 초대왕으로 세우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국으로 건설하도록 사명을 주셨어요. 위로는 사무엘 선지자의 말을 청종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사랑하며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주신 사명을 좇아 살길 원하셨어요. 사울이 처음엔 두렵고 떨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좇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명의 본질이 흐려졌어요. 시기와 질투의 화신이 되어 죄 없는 다윗을 죽이려는 데에 혈안이 됩니다. 결국 사명을 완전히 망각하여 곁길로 빠졌고 불행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왜 사명을 잃어버려요? 욕심이 앞서면 그래요. 욕심이 앞서면 사명이 퇴색됩니다. 결국 욕심 때문에 눈이 멀고 욕심 때문에 시험에 넘어가 사명을 잃어요. 몇 년 전에 어느 목사님이 동유럽을 여행하고 와서 해 주는 얘길 들었어요. 많은 선교사님들이 사명을 잃어버렸대요. 처음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열심히 선교했어요.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열매가 없어요. 어떤 분은 10년 동안 사역했지만 한명도 구원을 못시켰어요. 선교사님들은 낙심되고 절망되어 우울증에 걸리거나 정신질환을 앓기도 한답니다. 어느 선교사님이 의욕을 가지고 사역하러 오면 당신도 별 수 없을 거요 하며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한대요. 아무리 해도 열매가 없으니 지치고 낙심만 되요. 그래서 사명을 잃었어요. 그 목사님은 사명을 잃은 동유럽의 선교사님들을 부등켜 안고 울었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사명을 잃는 이유가 또 있어요. 처음엔 의욕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려 하는데 막상 사명을 감당하다보니 자신이 준비가 안 되어 있음을 알게 되요. 어느 성도님은 제게 “목사님, 이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좇아 살겠어요. 하며 주일학교 교사 일에 뛰어들었어요. 그런데 두달 만에 그만 두는 거예요. 자신의 인격과 신앙이 아직도 부족함을 깊이 느꼈다는 거예요. 마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민족을 구원하라고 사명을 주실 때 모세는 준비가 부족하다며 거부한 것과 같아요. 준비가 안 되었다고 중도에 사명을 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욕심으로 인하여, 탈진으로 인하여, 준비 부족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길에서 이탈합니다. 여기에 안타까움이 있어요. [해결책-사명을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주님의 열정적인 사랑] 오늘 본문에도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사명의 길을 포기하고 옛직업으로 되돌아간 베드로가 나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한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주님의 가장 사랑받고 가장 용기있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종종 예수님 앞에 “다른 사람은 다 주님 곁을 떠날지라도 저만큼은 주님의 곁을 지키겠습니다”하고 장담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님이 대제사장의 군대에게 끌려가시는 과정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사람이었고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주님 곁을 떠났던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의 대상인 주님이 사라진 지금 자신의 신앙은 이제 끝이 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어요. 부활하신 모습을 여러 사람한테 보이셨어요. 사람들이 기뻐하였고 베드로도 뛸듯이 기뻣어요. 하지만 주님을 뵐 면목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주님 앞에서 저지른 잘못을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해요. 주님이 잡히시던 날 베드로는 하녀들에게 주님을 모른다고 뻔뻔하게 거짓말했고 사랑했던 주님께 저주까지 퍼부었어요. 주님의 가슴에 깊은 상처와 실망을 안겼어요. 그 때만 생각하면 “나 같은 놈이 무슨 수제자였단 말인가” 하며 자책하게 되었어요. 요즘 말로 기분이 꿀꿀합니다. 남이 나에게 공격을 하면 같이 맞받아치고 상대를 욕하면 속이 후련 해지는데 베드로의 경우는 그렇지 않아요. 자기가 잘못했거든요. 자기의 형편없는 믿음의 바닥을 드러냈거든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주님 앞에 설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멀찍이서 뵙긴 했지만 주님께 가까이 가지 않았어요. 베드로는 아예 마음을 접었어요. 부활하신 주님 곁을 떠나기로 한거예요. 여러분, 믿음을 버리고 옛 생활로 돌아가면 행복합니까? 절대 그렇지 않아요. 베드로와 친구들이 고기잡이를 나갔지만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어요. 피곤하기만 했어요. 믿음을 버린 사람의 앞길은 열매없음을 보여줍니다. 그 때에 빈그물인 그들에게 찾아오신 주님은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 순종한 그들은 밤샘의 헛수고에서 많은 양의 고기를 잡았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버린 사람이라도 주님께 돌아와야 다시 열매를 얻는 거예요. 그래야 주의 능력도 축복도 맛보는 거예요. 고기를 걷어 올린 후에 누군가 “주님이시다!” 큰 소리를 치자 베드로는 순간 갈등이 생겼어요. 주님을 볼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러나 물로 첨벙 뛰어 내렸습니다. 첨벙 첨벙... 주님은 베드로의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사명을 떠난 제자들이 보고 싶어 이른 새벽에 찾아오신 주님을 보세요. 추위와 피곤에 지친 영혼들에게 따뜻한 불과 음식을 주려고 숯불을 피워놓고 고기와 떡을 올려놓고 기다리시는 주님을 보세요. 숯불을 피우기 위하여 모래밭에 돌을 모아놓고 장작을 모아 불을 붙이려고 바닥에 엎드려 입으로 훅훅 불고 있는 주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불피우는 연기에 눈물이 흘러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열심히 바람을 불어대며 불씨를 살리시는 주님을 보세요. 자신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고 떠났던 사람,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외로운 매달림을 알고도 죽음이 두려워 주님 곁을 떠났던 베드로에게 정성을 다하는 주님을 보세요. 자격지심에 제자 될 자격이 없다며 믿음의 길을 포기하고 세상으로 가버린 제자를 찾아가시는 주님의 이 행위를 뭐라고 표현할까요? 사랑입니다. 주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베드로 자신은 포기했을지 몰라도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 주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이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베드로에게 잃어버린 믿음을 되찾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생각합니다. “혹 주님이 날 보고 혼내시면 어떻게 하나?” 두렵고 떨리는 맘으로 주께 다가갑니다. 그 때에 우리 주님은 단 한마디의 책망도 않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얼떨결에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억했습니다. 끌려가시던 밤 베드로가 멀찍이서 주님을 따랐던 것도, 가야바 앞뜰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따라온 것도, 주님 부인 후에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한 것도 주님에 대한 사랑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아셨습니다. 주님께 상처를 준 것에 베드로가 그 토록 가슴 아파했고 주님을 실망시킨 것에 그토록 자신을 미워하며 절망했던 것도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베드로의 가슴 속에 남아있음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그 사랑을 회복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베드로야 비록 날 실망시켰지만 넌 아직도 날 사랑한단다. 너의 허물만을 보지 말고 이제 널 사랑하는 나를 보렴. 너는 아직도 가능성이 있어 앞으로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하는 마음으로 말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게 세 번씩 물으실 때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렇게 답변하는 동안 베드로는 자신의 마음 속에 남아있던 모든 실패, 잘못, 실수, 실망을 걷어내고 마음 밑바닥에 남았던 주님에 대한 사랑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진심으로 말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기에 회복의 은혜가 있어요. 여기에 잃었던 믿음을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이 회복되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 양을 치라. 잃었던 사명을 회복시키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자 더불어 베드로의 사명도 회복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훗날 은혜에 빚진 자의 심정으로 주 위해 충성하되,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기까지 충성하였습니다. 여기에 사명을 회복시켜 쓰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사람은 상대로부터 실망스러움을 발견하면 등을 돌립니다. 비난하며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하지만 우리 부활의 주님은 끝까지 다가와 설득하며 사람을 다시 세우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때론 낙심하거나 실망하여 믿음을 내 팽개쳐도 하나님은 방치하시지 않습니다. 다가오셔서 믿음을 회복시키시고 회복의 기쁨, 회복의 감격을 주시고 다시 사명의 길을 가게 하십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한 시대를 귀하게 쓰셨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국가가 정의롭지 못할 때 예언도 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며 국가가 자신을 필요로 할 때 목숨을 내 던지며 나라를 구했던 사명자였습니다. 그의 믿음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성령으로 충만하였고 존귀하게 쓰임받았습니다. 그런데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왕비에 의하여 죽음의 위기를 맞자 멀리 브엘세베로 도망가 그곳에서도 하룻길을 더 가 깊은 산속에 숨어 로뎀나무 아래 앉아 기진맥진하여 기도합니다. 하나님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무기력해지고 담대했던 믿음 다 잃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허약한 믿음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엘리야의 시대가 다 끝난 것 같았습니다. 더 이상 엘리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 때에 하나님이 다가와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며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십니다. 아들아 힘을 내라 하시며 부드러움으로 엘리야의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40일 동안을 어루만지시는 동안 그의 소진되었던 마음이 점차 회복되고 의욕이 생기고 마침내 잃었던 믿음이 회복되고 사명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명 감당에 필요한 영적 힘을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다시 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여기에 회복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가 믿음을 잃었을 때에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믿음을 회복시키시고 사명을 회복시켜 주의 영광에 존귀하게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명을 놓아버린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가진 직분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봉사하고 있다면 그 역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며 그 사명 감당할 능력도 주셨습니다. 혹 사명의 자리를 떠나 방관하고 있다면 이 아침 포기하지 않고 다가와 믿음을 주시고 사명을 감당하도록 새 힘을 주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부활의 주님 앞에 흔들릴 수 없고 변질될 수 없는 믿음의 결단으로 사명이 회복되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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