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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이 내 것이 되려면

심양섭

눅 24:36~24:53 본문보기

내용

[복음의 의미와 주요 5단계]
오늘 주제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복음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마지막 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의 예고편입니다. 한 책을 끝내고 새 책으로 넘어가는 매우 뜻깊은 순간입니다. 누가복음의 마지막이 부활 승천의 복음이라면, 사도행전의 시작은 사실상 성령 강림의 복음입니다. 사도행전의 첫 장에서는 누가복음을 이어 부활 승천을 말하지만 둘째 장에서는 바로 성령 강림의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복음이 하나의 단계를 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누가복음 책거리를 하면서 복음에 대해 다시 한 번 기초를 다지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음이라는 단어를 비유적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세탁기의 발명은 여성들에게 복음이었다는 식입니다. 역사적으로 정말 획기적인 일이나 그런 일에 관한 소식이 복음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서 사용하는 복음이라는 말은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의 복음은 단순히 기쁜 소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의 복음은 정확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혹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성경에서 “~의 복음”이라는 표현을 찾아봤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막 1:1; 롬 15:19; 고전 9:12; 고후 2:12; 고후 9:13; 고후 10:14; 갈 1:7; 빌 1:27; 살전 3:2)이 복음이 아홉 번으로 가장 많이 나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복음”(막 1:14; 롬 1:1; 롬 15:16; 고후 10:17; 살전 2:2; 살전 2:8; 살전 2:9; 벧전 4:17)이 여덟 번 나옵니다. 그밖에 “하나님의 나라 복음”(눅 4:43), “하나님 나라의 복음”(눅 16:16), “화평의 복음”(행 10:36),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 20:24), “그의 아들의 복음”(롬 1:9),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고후 4:4), “구원의 복음”(엡 1:13), “평안의 복음”(엡 6:15), “우리 주 예수의 복음”(살후 1:8),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딤전 1:11)이라는 표현이 각각 한 번씩 나옵니다.
“그의 아들의 복음”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치면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열한 번으로 가장 많이 나오는 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마가복음 1장 1절의 표현 그대로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라는 것이 복음의 본질인 것입니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이 세 가지 종교를 묶어 ‘아브라함의 종교’라고 합니다만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기독교의 차별적 정체성을 대표하고, 그렇기에 우리가 크리스천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그리고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 “화평”, “은혜”, “영광”, “구원”, “평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심으로써 시작되고 주어지고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가 없이는 그 어느 것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인 것입니다. 복음의 시작도 끝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의 다섯 가지 주요 단계
복음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주요한 다섯 단계를 거칩니다. 첫째는 메시아 강림의 복음입니다. 아기 예수 탄생의 복음입니다. 찬송가 115장 “기쁘다 구주 오셨네”가 바로 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인데 구주가 이 땅에 오신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2장 10절에서 천사가 목자들에게 알려주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구약성경은 그 전체가 오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포로 시절 같은 고난을 겪으면서 이제나 저제나 메시아가 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그 메시아가 오신 겁니다. 메시아, 구주, 그리스도는 같은 말입니다. 메시아가 오셨는데도 이스라엘의 다수가 그 분을 몰라보고 인정하지 않은 게 문제일 뿐입니다. 유대교 교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인구 760만 명 중에서 2퍼센트 조금 넘는 17만 정도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17만 명도 예전에 비하면 크게 늘어난 것이어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가까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째는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새 찬송가 305장(통합찬송가 405장)이 바로 이 복음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저주스러운 형틀이고 우리 주님이 거기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그게 복음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내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냅니다. 대속의 은혜입니다. 나는 내가 지은 죄의 죄값으로 마땅히 죽었어야 하는데 내 대신에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고, 그 피값으로 내 죄가 속해졌습니다. 바로 ‘대속’입니다. 죄 없는 분이 흠 없는 완전한 제물로 바쳐짐으로써, 즉 영단번의 제사로써 나를 포함한 온 인류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시대처럼 죄를 지을 때마다 반복해서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구원 받기 위해 율법의 규정 하나하나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지켜야 하지만 이제는 내 힘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저절로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에 감격해서, 그 은혜에서 비롯되는 힘으로 말미암아 성결한 삶도 살고 선행도 하는 것이지, 율범에 얽매여서 사는 게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더불어 율법의 시대는 끝나고 사랑의 시대, 은혜의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 할렐루야!
셋째는 빈 무덤의 복음, 즉 부활의 복음입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하고 부르는 새 찬송가 160장(통합찬송가 150장, “무덤에 머물러”)이 바로 이 복음입니다.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임 당하셨던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으니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동네방네 뛰어다니며 알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복음입니다. 빈 무덤 앞에서 주님을 만났던 막달라 마리아도,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났던 두 제자도 즉시 다른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주님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주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살아나신 부활의 복음이 있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천국 소망도 있고, 교회도 있는 것입니다.
넷째는 성령 강림의 복음입니다.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라고 부르는 새 찬송가 185장(통합 찬송가 179장)이 바로 이 복음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그리고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에 약속하신 성령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바람 같이, 불 같이 임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비로소 제자들이 용기를 얻어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도 견디며 승리의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온갖 박해와 조롱 속에서도 교회가 흥왕할 수 있는 것도 성령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없는 신앙생활은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다섯째는 재림의 복음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십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이지만 이것보다 더 확실하고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초림과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지만 주님이 다시 오시면 그 나라가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그 날이 되면 우리의 몸도 영화롭게 부활할 것입니다. 죽음의 영, 즉 사단은 주님이 부활하실 때 이미 정복되었지만 재림 때 완전히 멸해질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한 우리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열리는 새 하늘 새 땅에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 것입니다. 그 날까지 우리는 어떠한 고난이 오더라도 뚜벅뚜벅 제자도의 길을 굳건하게 걸어갈 것입니다. 할렐루야!

[제자들이 부활을 믿지 못한 이유]
안식일 후 첫날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빈 무덤은 그 사실을 웅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용맹하기로 소문난 수석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여인들의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 거기에 주님이 안 계신 걸 확인하고서도 반신반의합니다. 오늘 본문에 참 재밌는 표현이 나옵니다. 자신의 부활을 확증하시려고 주님이 제자들이 있는 곳에 오셔서 못자국 난 손과 발을 보여주셨지만 제자들이 “너무 기뻐” 믿지 못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슬픔에 빠져 있던 제자들이 다시 주님을 뵈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너무 기쁘다가 보니까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혼란스러웠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40절과 41절을 다같이 한 번 읽겠습니다: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눅 24:40-41)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선뜻 믿지 못한 것을 저는 어떤 면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어도 마음으로 확신이 가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서론다섯 살이던 1994년에 세례를 받았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기는 마흔두 살이던 2001년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믿음을 갖기까지 칠 년이 걸린 겁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느끼는 어려움도 바로 이런 것 아닙니까? 간혹 주저없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수님을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갖추고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더 안 믿는 경향도 있습니다. 스스로 착하다고 여기는 사람일수록 더 안 믿습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강하게 가지고 있으면 눈 앞에 주님을 보면서도 믿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을 포함한 24장 말씀 전체를 가지고, 제자들이 왜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는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중에 아직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첫째,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6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눅 24:6)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여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환기시킵니다. 바로 7절에 나오는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들을 때도 건성으로 들었고, 지금 와서는 그 말씀 자체를 기억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여인들은 처음에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 24: 16)

가리어졌던 눈이 다시 밝아지면 부활 주님을 알아보게 되고 부활을 믿게 됩니다. 그 내용이 31절에 나옵니다: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눅 24:31)

주님이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30절) 엠마오로 간 두 제자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우리의 눈이 밝아질 때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부활을 못 믿는 사람이 있다면 눈이 밝아지도록, 영적인 눈 즉 영안이 열리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시면 육안으로는 부활 주님을 못 뵈었지만 주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셋째, 미련해서입니다.
미련해서 선지자들이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기 때문에 부활 주님이 나란히 걷고 계신데도 몰라본 겁니다.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눅 24:25)

‘미련하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터무니없는 고집을 부릴 정도로 매우 어리석고 둔하다”라고 나옵니다. 비슷한 말로는 어리석다, 미욱하다, 멍청하다, 우악스럽다, 미련스럽다, 둔하다, 우둔하다, 아둔하다, 덜되다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둔하다’가 저를 잘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민감해야 하는데 둔한 겁니다. 잠언에 따르면 미련한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고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자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하나님 말씀인 지혜와 훈계를 경청하고 따를 때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속히 믿게 되고, 부활도 믿게 될 것입니다.

넷째, 무서움 때문이었습니다.
37-38절을 보면 제자들이 부활 주님을 보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눅 24: 37-38)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실 때에도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하면서 두려워했습니다(마 14:26; 막막 6:49). 오늘 본문의 열한 사도들도 부활 주님을 유령으로 생각했습니다. 5절을 보면 무덤에 갔던 여인들도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 즉 천사들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눅 24:5)

제자들과 여인들이 왜 두려워했을까요? 주님(과 주님의 심부름꾼인 천사들)을 잘 몰랐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잘 들었다면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의 계명을 듣고 지키는 자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요 14:21).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했습니다(요일 4:18). 하나님이 사랑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면, 그래서 내가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부활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부활을 믿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 주님을 보고도 잘 안 믿었습니다. 우리는 부활 주님을 목격하지 못하고도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제자들의 신앙보다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확고부동한 부활 신앙을 가진 분들은 이 점에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겠습니다.

[부활 신앙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부활을 믿고 부활 신앙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눅 24:8)

여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니 부활이 믿어지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성경 말씀을 기억할 때 부활을 확신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알려야 합니다.
9-10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눅 24: 9-10)

여인들이 알렸지만 제자들은 안 믿었습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이 믿든 안 믿든 우리는 알려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부활 주님께 보고 들은 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눅 24:35)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알릴 때는 즉시 알려야 합니다. 33절에 보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 주님을 만나고는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알렸다고 합니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웠는데도, 즉 밤인데도 이십오리 길을 되돌아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셋째,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31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눅 24:31)

눈이 밝아져야 부활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밝아지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이 축사하시고 떼어 주신 떡을 먹을 때 눈이 밝아졌다고 하니까 우리도 떡을 먹어야 하는데 떡은 주님의 몸이고, 주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의 양식 즉 말씀을 먹으면 우리의 눈도 밝아질 걸로 믿습니다.

넷째,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32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 24:32)

여기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를 영문(ESV)으로 보면 “성경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실 때”(while he opened to us the Scriptures)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45절과 같은 맥락입니다: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 24: 45)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닫힌 마음을 열어젖혀야 합니다. 주님이, 주님의 영인 성령님이 닫힌 내 마음을 열어 주시고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열려서 말씀이 들릴 때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렇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해야 부활 신앙이 내 것으로 되고 나의 믿음이 점점 단단해질 수가 있습니다.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
이 네 가지 중에서도 네 번째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이 가장 중요하다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감리교에서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신앙 체험을 하나의 핵심 교리로 삼고 있는데 그 체험은 다름 아닌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가 직접 했던 체험입니다.

“저녁에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나는 올더스케이트 가에서 모이는 한 교회의 집회에 참석했다.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로마서에 대한 루터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쯤 되었을 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심으로써 일어나는 변화에 대하여 설명할 때에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고 그때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사하여 주시고 나같은 죄인의 죄마저도 또한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일지, 1738년 5월 24일)

모라비안 신도회의 작은 기도 모임에서 위대한 제2의 종교개혁가 웨슬리가 탄생했던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기 위해 여러 집회를 찾아 돌아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소속교회의 모든 예배와 구역 모임, 성경공부 모임, 그리고 개인 기도와 큐티 중에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은혜의 자리에 날마다 규칙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자꾸 할 때 부활 신앙이 내 것이 되고, 점점 더 단단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을 억지로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 자신이 바로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11:25-26절을 봅시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예수님이 곧 부활이므로 예수님이 내 안에 주인으로 다스리고 계신다면 부활은 저절로 믿어지고, 부활 신앙은 내 것이 될 것입니다.

[정리와 기도]
오늘 설교를 정리하겠습니다. 우선 복음에는 주요한 다섯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메시아 탄생의 복음,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 부활의 복음, 성령 강림의 복음, 그리고 재림의 복음입니다. 이 다섯 가지의 공통 기반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할렐루야~.
다음으로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데에는 네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셋째, 미련해서였습니다. 넷째, 무서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고 나아가 부활 신앙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바로 알려야 합니다. 셋째,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넷째, 마음을 열어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이 중에서도 말씀에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이 제일 중요합니다.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자주 합시다. 큐티, 예배, 그리고 구역과 성경공부 모임에 즐겨 참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난 6월 1일부터 누가복음으로 큐티하기 시작해서 거의 석 달 만인 오늘 누가복음을 끝냈습니다. 누가복음을 쓴 누가는 역사가이자 의사입니다. 의사 출신의 저자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한 주님의 부활을 저도 믿습니다. 날마다 규칙적으로 은혜의 자리에 나아감으로써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자주 하게 해 주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부활 신앙이 제 것이 되고, 저의 믿음이 더욱 더 단단해지게 해 주십시오. 십자가의 그 놀랍고도 넘치는 은혜의 복음과, 죽음을 딛고 일어서신 주님의 부활 복음으로 무장해서 오늘 삶의 자리에 닥치는 모든 고난을 돌파하게 도와주시고, 나아가 저 북녘 땅의 견고한 진을 깨뜨리고 진정한 복음 통일을 속히 이루도록 도와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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