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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 예수

심양섭

딤전 2:5~2:6 본문보기

내용

2012년 10월 21일(일) 열방샘교회 청년부 설교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 예수(딤전 2:5-6)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왜 그리스도 예수만이 유일한 중보자인가?
5절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인 유일성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신 6:4). 모든 유대인은 매일 아침과 저녁 쉐마(Shema, 신 6:4-9)에서 이것을 고백하였습니다(막 12:29). 쉐마란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쉐마는 히브리어로 “들으라”라는 뜻입니다. 신명기 6장 4절이 “이스라엘에 들으라”로 시작하는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

원래 5절은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시작되는데 한글 성경에서는 이것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5절과 6절은 앞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그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므로 그 하나님은 “모든 사람”(4절; 롬 3:29-30; 갈 3:20)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제각기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 신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 집단으로 나누어 산다고 해서 각각 자기 신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간에 구원을 원하는 사람은 오직 한 분뿐인 참된 하나님에게로 나와야만 합니다.
5절은 이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며 그 분은 곧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합니다. 중보자(仲保者, mediator)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그 관계를 성립시키고 화해를 가져오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을 대표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람을 대표하는 분입니다. 그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6절)로 드림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모든 것을 제거하는 분입니다(요 14:6; 히 8:6).
그러니까 5절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구절과 “중보자도 한 분”이라는 구절은 서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한 분뿐이므로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려면 단 한 분뿐인 참 하나님에게로 나와야 하는데 그 참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이스라엘의 메시아(구세주)입니다. 그 예수님이 유일한 중보자, 즉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행 14:21)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인간, 완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에 실제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유일한 중보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5절에서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강조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더불어 인성을 아울러 지니신 분이셨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과 거룩한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몸으로 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고 인간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고(속죄하고), 동정심 많은 대제사장(히 4:15)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인간이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그 엄청난 중보사역을 이루어내셨나요? 당시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던 로마제국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던 열심당원들처럼 반란을 주도하셨나요? 아니면 헤롯왕처럼 로마제국에게 잘 보여서 분봉왕이 되셨나요? 아니면 나사렛 같이 가난한 지역의 가난한 주민들 위해 사회복지 시민운동을 주도하셨나요? 그 형태가 어떠했든지 간에 그런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인류구원의 중보사역을 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는 화목사역을 이루어내셨는지는 6절에 나옵니다.
6절에서는 “그(그리스도 예수)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다고 합니다. 대속물(代贖物, ransom)은 노예나 포로로 팔려간 사람을 풀려나게 하기 위해 지급하는 금품을 말합니다. 복음서와 바울 서신을 비롯한 신약성경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속” “대속물” “속량(贖良)” “피로 사서”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갈 1:4; 2:20; 엡 5:2; 눅 1:68; 2:38; 24:21; 딛 2:14; 히 9:12; 벧전 1:18; 마 20:28; 계 5:9). 예수님 자신도 스스로의 사역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이 자신을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죄인인 우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과 ‘대속’ 또는 ‘속량’은 서로 긴밀히 연관된 말이지만 그 뉘앙스에 차이가 있습니다. ‘구원(救援)’은 사전적 의미로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줌’이고, 우리 기독교에서는 인류를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 내는 일을 말합니다. ‘속량(贖良)’은 고대의 노예 혹은 노비 문화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속량’은 사전적 의미로 “몸값을 받고 노비의 신분을 풀어 주어서 양민이 되게 하던 일”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속량’은 ‘속죄(贖罪)’, 즉 죗값을 대신 치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한 일입니다. ‘대속(代贖)’은 사전적 의미로 “남의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거나 속죄함”을 말합니다. 실제 역사를 보면 종이 주인 대신 벌을 받던 일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를 보면 어린 황제가 잘못을 했을 때 내시나 다른 사람이 대신 벌을 받았습니다. 우리 기독교에서의 ‘대속’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그 보혈(寶血)로 인류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한 일을 말합니다.

왜 우리에게 ‘중보자’가 필요한가?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그는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짓고 타락한 이래 인간은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죄의 결과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졌을 뿐 아니라 다른 인간과 끊임없이 갈등하고 싸우며 지냈습니다. 죄의 문제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거역이고, 그 죗값은 사망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하나님은 거룩합니다. 그 반면에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심지어는 모세와 같은 위대한 인물조차도 죽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없었습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죄인에게는 그를 대신하여 하나님에게 나아갈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면서 사람이신, 그러면서도 죄는 없으신, 그리스도만이 그 일을 감당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디모데전서 2장 5절과 6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캔터베리의 안셀름이 1098년에 펴낸『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말하듯이, 인간은 죄에 대한 보상을 치르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죄의 분량에 따라 대가를 치러야만 하며, 인간은 스스로가 그 대가를 치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자신의 피 값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실 중보자인 그리스도 예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예수님의 위대하신 중보사역, 곧 역사적인 화해사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은 모든 죄의 수와 크기를 능가합니다. 즉,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으며 너무나 무거운 모든 죄들의 무게를 능가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죽음은 그를 죽인 자들의 죄마저 씻어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완전한 하나님이셨지만 죄가 없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와 ‘중보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선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중보기도’라는 용어와 혼동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중보기도’는 대개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용어는 개역개정이나 개역개정의 옛 버전인 개역한글 성경에는 없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만 ‘중보기도’란 말이 나오는데 영어의 ‘intercessions’(NIV, KJV)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개역개정과 개역한글에서는 이 영어 단어를 ‘도고(禱告)’라는 단어로 옮기고 있습니다. ‘도고’는 기도하여 아뢴다는 뜻인데 중국어성경에서 ‘기도’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보다 조금 앞서 나오는 디모데전서 2장 1절 말씀을 표준새번역, 개역개정과 개역한글 버전으로 각각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와 기도와 중보 기도와 감사 기도를 드리라고 그대에게 권합니다.(표준새번역)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禱告)와 감사를 하되(개역한글/ 개역개정)

개역개정과 개역한글 성경에서 ‘중보기도’란 말을 쓰지 않는 것은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할 때의 ‘중보자’와 혼동을 불러일으킬까봐 쓰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중보’를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죠. ‘유일한 중보자’라고 할 때의 중보는 우리가 사영리(四靈理)를 가지고 전도할 때 자주 사용하는 다리예화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다리를 놓는 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죄로 인하여 멀어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구원의 십자가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중보기도’하는 우리 성도들이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못합니다. 오직 한 분 그리스도 예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성인이나 인간 사제가 끼어들 여지가 있는가?
다음으로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혹은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성인이나 인간 사제 같은 다른 중개인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 천사, 그리고 교회에 의해 가경자(可敬者)로 추서된 성인, 신부 같은 사람들이 일종의 중보자로 인정됩니다. 신자가 바라는 것을 이들이 하나님에게 대신 탄원해준다는 것입니다. 성인들, 특히 성모 마리아는 궁극적 중보자인 그리스도에게서 영적 권능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중보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에게 주어지도록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가톨릭에서 성모 마리아는 또 한 명의 중보자(mediatrix, mediator의 여성형)입니다. 마리아는 신자의 영적 성장과 성숙을 돕는 협력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톨릭신자들은 마리아에게 기도하기도 합니다. 개신교신자들이 하나님에게 직접 죄를 고백하는 것과 달리, 가톨릭신자들은 신부에게 죄를 고백하는데 이러한 가톨릭의 고해성사는 일종의 상담으로 본다면 긍정적인 점도 분명히 있습니다만 복음주의 개신교의 교리와는 맞지 않습니다.
러시아정교나 그리스정교, 이집트정교, 에티오피아정교 같은 동방정교에서도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성도들이 성모 마리아나 다른 죽은 성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가능하고 정당하며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성인 같은 사람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것에 문제의 초점이 있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개신교인들도 살아있는 성도들에게 자신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기도’해 주도록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주의 개신교가 거부하는 것은 죽은 성인들이 우리의 기도를 받아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성인이나 성도에게 기도를 부탁하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죽은 성도와의 접촉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재림과 부활을 믿고 기대하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구약성경의 ‘중보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오직 한 분의 중보자밖에 안 계시지만 구약성경을 보면 다양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낮은 차원에서 일종의 중보적인 사역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그런 사람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모든 백성은 산 밑에서 기다렸습니다(출애굽기 19장).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너무나 놀란 나머지,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직접 듣게 하지 말고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자기들에게 가져와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출 20: 18-21). 하나님도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도록 승인하셨습니다(신 5:28-33).
그러나 디모데전서 2장 5절에서 말하듯이, 오직 한 분의 중보자밖에 안 계시다면, 모세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모세는 궁극적인 중보자가 아니었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예표, 즉 미리 나타내어 보인 것입니다(prefigured). 모세도 죄가 있었기 때문에, 용서 즉 자신을 위한 죄 없는 중보자가 없었다면 하나님 앞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장차 그리스도가 와서 모세의 죗값을 치르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를 자신의 면전에 나올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인류를 위한 대속의 사역이 미리 모세를 위해 그 효과를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 점은 구약의 모든 성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완벽하게 거룩하시므로, 그들 모두도 완벽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 때문에, 은혜에 의해, 그들도 완벽하다고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신약 성경과 구약 성경을 통틀어 구원에 이르는 길은 한 길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구약에 있어서의 구원의 사례들도 모두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구원이 자주 중보자,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이나 제도를 통해서 옵니다. 구약에서의 모든 작은 중보 사례들은 그리스도를 예시(豫示)합니다. 오직 한 분의 중보자와 구원에 이르는 오직 한 길만이 있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가져오는 사례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서 있는 사례를 주목하면 성경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개인적인 교제, 영적인 친밀함,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의 약속의 형태로 ‘영적’ 구원을 가져오는 경우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일시적인’ 그리고 외적인 구원, 즉 영적 의미에서의 구원을 예표하는 물리적 의미에서의 ‘구원’도 포함됩니다. 실제로 구원은 단지 영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몸의 부활과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을 간절히 기대합니다. 개인적인 구원은 마음의 거듭남과 더불어 시작하지만, 결국 그 범위는 포괄적이며 우주적인 데까지 나아갑니다. 구약성경이 땅과 형통과 건강과 같은 물질적인 것에 주목할 때에,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신자의 형통의 물질적 측면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중보자에는 선지자, 왕, 제사장이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였습니다. 왕은 하나님에게 순종할 때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그리스도는 선지자, 왕, 제사장 이 세 가지 기능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최후의 선지자요, 왕이요, 제사장입니다(히 1:1-3).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지혜를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현명한 사람들도 있고, 적들의 침략과 위협에서 민족을 구원하는 전사들도 있고,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백성에게 말해주는 가수들도 있습니다.
중보는 사람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제도를 통해서도 이루어집니다. 언약(covenants)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중보사역을 행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백성에게 가져다줍니다. 동물희생제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백성에게 선사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설정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말씀과 자신의 임재를 백성들에게 전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러한 측면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이상의 모든 방법들이 일종의 중보사역을 행하지만 중보자는 오직 한 분밖에 없으므로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명확합니다.

마무리와 기도
지금까지 왜 그리스도 예수만이 유일한 중보자인지, 그리고 왜 우리에게 중보자가 필요한지, 중보기도와 중보자의 차이는 무엇인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성인이나 다른 인간 사제가 끼어들 여지가 있는지, 그리고 구약성경의 중보자들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심판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죄가 있기 때문에 죄가 없으신 거룩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구원을 받고 영생에 이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필요했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신, 그러면서도 죄는 없으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어떻게요?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하여 대속물로 드림으로써 중보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자신의 피로 우리의 자유를 사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뿐임을 다시금 확실하게 깨닫게 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하여 죄를 지은 이래로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을 뿐 아니라 인간들의 관계에서도 평화는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상에서 당신의 피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하셔서 영생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피묻은 십자가의 복음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하시고, 다른 복음을 찾지 않게 해 주시고 다른 복음에 현혹되거나 속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제 십자가의 복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빈 무덤의 부활신앙으로, 또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강림 신앙으로, 또 수많은 사도들과 믿음의 선진들의 순교의 신앙으로, 저 북한 땅의 ‘남은 자’인 지하교회의 그루터기 신앙으로 발전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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