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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가상이언: 구원의 말씀-우리도 주님과 함께 낙원에 가려면?

심양섭

눅 23:32~23:43 본문보기

내용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신 두 번째 말씀, 즉 가상이언(架上二言)은 옆에 나란히 달린 한 강도를 향한 구원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좌우에 달려 있던 두 명의 강도 중에서 한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뒤늦게 깨달은 강도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자기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였고, 예수님은 즉시 구원과 낙원행을 선포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이와 같은 가상이언은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지부터 알아봅시다.
32절을 보면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던 날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진 행악자 두 명이 있었습니다. ‘행악자’는 ‘죄수(criminals)’입니다. 개역개정과 개역한글 판에는 ‘행악자’라고 되어 있지만, 공동번역이나 표준새번역, 현대인의 성경에는 공히 ‘죄수’라고 나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7장 38절과 마가복음 15장 27절에는 ‘행악자’가 ‘강도들(robbers)’이라고 나옵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님 좌우편의 두 강도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마 27:38)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막 15:27)

예수님이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이사야서 53장 12절 예언의 말씀을 성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죄 많은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죄 없으신 주님이 범죄자 취급을 당하신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강도입니다. 왜냐하면 첫째, 하나님이 주인인데 내가 주인 행세하며 마음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범죄이고 엄벌에 처해집니다. 둘째, 하나님이 주신 재능, 시간, 물질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횡령죄에 해당합니다. 이승구 합동신학대학원 교수는 학생이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말씀에 따라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그리하지 않는다면 불순종의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33절을 보면 예수님이 달리신 곳은 ‘해골이라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7장 33절과 요한복음 19장 17절에는 골고다라고 나옵니다. ‘골고다’는 해골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입니다: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마 27:33)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요 19:17)

우리는 주님이 달리신 이 언덕을 갈보리 언덕이라고도 많이 부릅니다. ‘갈보리’는 ‘해골’에 해당하는 라틴어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34절에는 우리가 이미 살펴 본 가상일언, 즉 용서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좌우편의 강도들은 예수님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용서의 기도를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예수님이 자기를 매단 사람들의 용서를 구하는 반면에 십자가 아래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이 천연덕스럽게도 예수님의 속옷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제비를 뽑는 장면도 그들은 목격하였습니다. 똑같은 기도를 듣고, 똑같은 장면을 목격하였지만, 한 강도는 회개하였고, 한 강도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을 사는 모든 인간에게도 그 두 가지 선택이 주어져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제가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고, 회개한 자들의 무리에 속하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저와 같은 길을 선택하여 걷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35절부터 39절까지의 묘사가 흥미롭습니다.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첫째, 백성, 둘째, 관리들, 셋째, 군인들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먼저 백성은 서서 구경합니다(35절). 마치 누구 집에 불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경하러 왔거나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차 사고가 난 것을 보고 멈추어 구경하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구경만 한 것 같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행인들도 예수님을 욕했다고 나옵니다: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마 27: 39-40)

예수님을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유대인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2장에서 성전을 정화하신 후에 유대인들이 그에 항의하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19)

이 말씀은 사실 물리적으로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완공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 죽고 나서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2013년 11월 한국에서 <제3성전>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어 일부 유대인들의 제3성전 건립운동이 갑자기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만, 이 말씀에서 보듯이 신약시대에는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고 또한 우리 모든 성도들이 성전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3:16)

따라서 구약시대의 성전을 예루살렘에, 그것도 이슬람 측과 정면충돌을 불사하면서까지 복원하겠다는 것은 일종의 넌센스라고 해야겠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외지인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27장 39절의 ‘지나가는 자들’과 누가복음 23장 35절의 ‘백성’은 같은 부류라고 보아 무방할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운명하고 백부장이 예수님을 의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가슴을 치’(눅 23:48)는데 이는 슬픔과 회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슴을 치는 행동은 누가복음 18장 9절부터 14절까지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대조적인 기도에서 세리가 가슴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 13)

다음으로 관리들은 이스라엘의 산헤드린(Sanhedrin)을 구성하였던 정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비웃으면서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35절)라고 조롱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직접 조롱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조롱한 것입니다. 이러한 조롱은 일찍이 시편 22편 7-8절에서 이미 예언된 것입니다:

7.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 22:7-8)

군인들도 예수님을 희롱하고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주면서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라고 말합니다(눅 23:36-37). 군인들은 바로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을 체포했던 사람들입니다: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요 18:12)

그러니까 이 군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는 것에서부터 십자가에 못박는 것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고 집행하였던 자들입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는 관리들과 같습니다. 관리들과 군인들의 태도는 이스라엘 사회 내부의 시각과 외부의 시각이라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두 강도는 이와 같은 세 부류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를 내려다보고, 그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데 가담하였고, 다른 한 강도는 자신을 돌아보고 뉘우쳤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38절은 예수님의 머리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패가 있엇다고 말합니다. 이 패는 히브리어와 로마어와 헬라어 세 가지 언어로 쓰인 것이었습니다(요 19:20). 예수님의 위에 패가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십자가의 모양이 ‘X’나 ‘T’ 자 모양이 아니라 당시 전통적으로 쓰이던 ‘t’ 자 모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정죄하는 의미에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달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패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선언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요한복음 19장을 보면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놓고 유대 지도자들과 빌라도 총독이 언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21.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요 19: 21-22)

성탄 찬송 중에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라는 구절이 있듯이, ‘유대인의 왕’이란 메시아(그리스도), 즉 구세주를 의미하기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은 기분이 나빴습니다. 하지만 빌라도 총독으로서는 예수님이 왕을 자처한 것이 로마 황제를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형에 처한다는 차원에서 그 패를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에 앞서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발하면서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 19:12),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19:15)라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빌라도는 예수님이 아무런 죄도 범하지 않았음을 알았지만,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를 거역한 반역자로 예수님을 고발하자 예수님을 처벌하지 않을 경우 로마황제에 대한 자기의 충성심이 의심받을까봐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회개한 강도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이 패를 보고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고 믿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강도는 같은 패를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39절은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이 강도의 조롱은 관리들(35절)과 군인들(36-37절)에 이은 세 번째 조롱입니다. 35절의 ‘백성’도 조롱하였다고 본다면 네 번째 조롱이 됩니다. 우리 주님은 이 모든 조롱을 다 참으셨습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히 12:3)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고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남에게 핍박도 많이 받지만 더 심한 조롱을 참으신 주님을 생각하며 참아야 합니다. 주님을 생각하면 참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39절에 나오는 ‘달리다(hanged)’는 말은 ‘십자가에 못 박히다(crucified)’와 같은 단어입니다(행 5:30; 10:39; 갈 3:13; 신 21:22-23).
회개한 강도는 오늘 설교 본문의 42절에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는데 이것은 회개한 강도의 구원 요청인 동시에 신앙 고백입니다.
그런데 회개한 강도는 주님의 오른편에 있었을까요? 아니면 왼편에 있었을까요? 성경에는 어느 쪽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상칠언을 다룬 책자를 몇 권 읽다 보니 회개한 강도는 오른편 강도였다고 해석한 책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오른편이라고 주장하는지 의아했으나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46절까지에 나오는 양과 염소 이야기를 생각하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다시 오셔서 최후의 심판을 할 때 영생에 들어갈 사람들은 오른쪽에, 영벌에 들어갈 사람들은 왼쪽에 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두 강도는 온 인류를 대표합니다. 예수님은 구세주요 심판주를, 회개한 강도는 구원받는 주의 백성(용서받은 죄인)을, 회개하지 않은 강도는 지옥에 떨어질 무리(용서받지 못한 죄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한 강도는 주님의 오른편에 있는 강도라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설교 본문의 43절에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낙원(paradise)’은 천당(天堂)의 또 다른 이름이요, 하나님의 거처요, 의로운 자들의 영원한 집입니다(고후 12:4; 계 2:7). ‘낙원’이라는 단어는 또한 인류가 타락하기 전의 에덴 동산을 떠올리게 합니다. ‘파라다이스(paradise)’는 원래 ‘정원(garden)’이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합니다. 저는 2013년 여름 페르시아 답사여행에서 상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만, 사막 여행 중에 만나는 정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도 궁궐과 같은 정원을 말입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열사의 땅에서 장시간을 걷다가 물이 흐르고 나무가 있고 모든 음식과 필요한 것들이 다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낙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회개한 강도는 다음 날도 아니고 바로 그 날 그와 같은 낙원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낙원은 구원받은 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에덴 동산에 존재하였던 하나남과의 친밀하고도 인격적인 교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낙원으로 가려면?
회개한 강도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도 주님에게 낙원 초대장을 받을 수 있을까요?
첫째, 유행을 따르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회개한 강도도 처음에는 다른 강도와 함께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 27:44)

이스라엘의 백성들도 구경하면서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과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난했습니다. 왼편 강도도 예수님을 희롱하였습니다. 분명히 골고다 언덕의 주류는 예수님을 비웃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우롱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대세였습니다. 그러나 회개한 강도는 주류에 편승하지 않고 ‘좁은 문’을 선택했습니다. 주님과 삼년을 동거동락했던 제자들도 다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난 상황에서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몇몇 여인들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오른편 강도만이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회개한 강도는 회개하지 않은 강도를 단호하게 꾸짖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집단 따돌림을 당할 것을 각오해야만 예수님 편에 설 수 있는 것이 당시 갈보리 언덕의 분위기였습니다. 유행을 따르지 않은 그에게 구원의 상이 주어졌습니다. 구원은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 얻는 것입니다: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 7:13-14)

어제 저는 한국 대학생 백 명 중 네 명만이 기독교인(아마 개신교만을 의미한 듯)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젊은이들 사이의 유행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어쩌면 반기독교, 특히 반개신교 정서가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 매우 강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다수의 문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좁은 길을 선택하여 걸어갈 때 구원을 받고 생명을 얻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40절을 보면 회개한 강도는 회개하지 않은 강도에게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고 묻습니다. 실은 질문이라기보다는 강조어법입니다. 소위 반어법 문장입니다. 이를 쉽게 풀이하면 “너도 나와 똑같이 죽을 죄를 저질러놓고서도 하늘 무서운 줄을 모르느냐”가 됩니다. “너나 나나 중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1장 7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1:7)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지혜와 지식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조롱하는 ‘지나가는 자들’과 ‘관리들’과 ‘군인들’은 ‘미련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여 예수님을 희롱하였지만,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받고 고난받게 함으로써 인류의 죄를 사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낙원에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실 각오와 자세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실 생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천당에 받아들여지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날마다 저지르는 많은 죄, 그리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범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돈과 권력을 두려워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것과 따돌림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죄가 만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 두려워하면 다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똑같은 죄를 습관적으로 반복하여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만이 주님과 함께 낙원으로 갈 수 있습니다.

셋째,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미련 없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오늘 설교 본문의 40절에서 자신과 또 다른 강도가 ‘동일한 정죄’를 받았다고 말하고, 41절에서는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자신과 공범자는 그 저지른 죄악들을 생각하면 죽어 마땅하고, 당시의 가장 끔찍한 형벌인 십자가 처형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신과 공범자가 지금껏 저지른 죄가 흉악하였고 그 무게가 무겁다는 것을 완전히 시인한 것입니다. 그의 회개에는 억울함이나 미련이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나 ‘유권무죄 무권유죄’를 외칠 수도 있었고, 자신의 가난한 집안사정이나 성장 환경을 탓할 수도 있었고, 운이나 재수가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한 강도는 누구도, 다른 무엇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자신의 죄를 100% 시인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이혼한 사람을 만나보면 백이면 백 사람이 상대 배우자를 탓합니다. 부목사로서 담임목사를 폭행했던 사람도 자기에게는 잘못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남들 예를 들 것도 없습니다. 제 자신도 그랬습니다. 하나뿐인 아들과 크게 다투고 나서 제 잘못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내 심정을 이해해 주지 않는 아내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감옥 안에는 작은 도둑들만 있고 정작 대도(大盜)들은 다 감옥 바깥에 있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른편 강도는 일체의 억울함이나 미련을 표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극형인 십자가형도 달게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낙원 초대장을 받으려면 이 강도와 같은 ‘억울함 없고 미련 없는’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과 이사야서 64장 6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10)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이사야 64:6)

자기 의로 충만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기도 어렵고 회개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회개는 거듭남(born again)의 증거인데 회개하지 않고 어떻게 낙원에 갈 수 있겠습니까?

넷째, 예수을 알고 믿고 그의 이름을 믿고 불러야 합니다.
회개한 강도는 오늘 설교 본문의 41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과 공범자가 흉악범죄를 저지를 중죄인들인 것과 달리, 예수님은 비록 지금은 자신들과 동일하게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있지만 실은 무죄한 분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람 중에 무죄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위에서 로마서 3장 10절을 읽었듯이 사람 중에는 의인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여기서 말하는 ‘죄가 없는’ ‘대제사장’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에 죄가 없는 분입니다. 죄가 없는 완전한 제물로 십자가 제단에서 바쳐졌기 때문에 영단번의 제사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는 강도의 고백은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한 강도는 오늘 본문의 42절에서 “예수여”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13)

예수님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는 곧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메시아’임을 의미합니다. 이름은 그 분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우리도 구원을 받으려면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믿고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다섯째, 예수님께 구원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마치 키 작은 세리 삭개오가 주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갔듯이 적극적으로 주님을 찾고 구원을 간구해야 합니다. 회개한 강도는 오늘 설교 본문의 41절에서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물론 이 말에는 그의 신앙고백도 담겨 있지만 또한 구원의 간구도 담겨 있습니다. ‘당신의 나라’라는 말에서 이 강도가 예수님의 왕 되심을 알고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자신을 기억하여 줄 것을 간구한 것입니다. 주님이 단지 자신을 기억하기만 하여도 구원받을 줄로 믿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힘없이 죽어가는 예수님에게,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조롱받는 예수님에게, 이 강도는 낙원으로의 동행을 구하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담대하게, 용기있게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소리로 외치지는 않았지만 그처럼 남다른 태도 자체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거지 맹인은 주님이 자기 곁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질렀고, 다른 사람들이 시끄럽다면서 조용히 하라고 하자 더욱 크게 소리질렀습니다. 누가복음 18장 39절과 41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39.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1.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눅 18: 39, 41)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감정적인 믿음의 체험뿐 아니라 의지적인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낙원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군중심리에 휩쓸려 부화뇌동해서는 안 됩니다. 대세에 편승하거나 주류에 편입하거나 유행을 좇지 말고 오히려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억울함이 없는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넷째, 예수님을 알고 믿고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다섯째, 구원을 절박하게 사모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구원의 문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고, 구원의 새 생명은 찾는 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신 두 번째 말씀인 구원의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며 나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주변에 길 잃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죄에 빠져 헤매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을 바라볼 때 때로는 정죄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멀리하려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내가 그들보다 훨씬 깨끗하고 의롭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별 차이가 없는 죄인들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듯이 저희들도 주변 사람들을 바라볼 때 주님과 동일하게 그들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하시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게 해 주십시오. 한 사람의 태신자를 품고 기도하면서 지속적으로 사랑을 베풀고 더욱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그들이 주님을 영접하기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고 힘과 지혜를 다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 자신부터 남을 험담하는 무리에 휩쓸리지 않게 하시고, 나 자신이 죄인임을 잊지 않고 날마다 애통하며 회개기도를 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과 예수님을 더 잘 앎으로써 이 땅에서도 영생의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시고, 날마다 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영적 몸부림을 멈추지 않게 해 주십시오. 모든 것 감사하며 예수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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