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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예수님의 짝사랑 그리고 제자도

심양섭

막 14:32~14:42, 마 26:36~26:46 본문보기

내용

십자가 죽음 앞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오늘 설교의 본문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 기도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기도하는 동안 깨어 있으라고 부탁하십니다. 제자들은 깨어 있지 못하고 잠을 잡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엄청난 시련을 앞두고 몹시 괴로워하십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극도의 슬픔과 고통을 경험하시면서 그것을 세 번의 고뇌하는 기도로 표현하십니다. 예수님은 같은 기도를 반복하셨는데(막 14:39) 그것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기도를 통하여 얼마나 간절하게 그리고 깊이 아버지 하나님과 대화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겟세마네란 “기름 짜는 틀(oil press)”을 의미합니다. 감람산은 올리브 숲에 있는 동산인데 올리브유를 짜던 곳입니다. 현재 이곳에는 만국교회(Church of All Nations)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교회는 4세기 비잔틴교회 터 위에 지어진 것입니다.
구약성경 절기 규정에 의하면 유월절 저녁은 반드시 예루살렘 일대에서 보내야 했습니다(신 16:1-7). 거기에는 감람산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행 1:12)에 있었습니다. 1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예루살렘과 성전 산(Temple Mount)에서 274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예루살렘 동편,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 감람산 기슭에 있었습니다. 감람산과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이 자주 다니시던 곳이며 특별히 공생애의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면서 십자가 죽음을 준비하신 곳입니다. 오늘날은 달라졌지만 예수님 생존 당시에는 이 산 전체에 감람(olive) 나무 숲이 퍼져 있었습니다.

고통의 순간에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
예수님은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있는 그 아픔과 시련의 시간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고 싶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가셨고 그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아끼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는 특별히 더 가까운 위치에 두고 기도하셨습니다(마 26: 37-38). 인생의 환난은 차라리 모르고 당하는 게 낫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너무나 잘 아시면서 당하는 것이었기에 그 고통은 훨씬 더 컸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자신이 체포될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오롯이 자기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막 10:38). 사람은 누구나 힘들고 괴로울 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 주기 원합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셨습니다. 그랬기에 외로우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제자들과 함께 있고 싶어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다음 두 구절에 잘 나타납니다: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막 14:34)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 26:38)

우리는 걸핏하면 “죽겠다” “죽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죽게 되었다”고 하신 것은 우리가 밤낮없이 “죽겠다” “죽겠다”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정말 피가 마르고 뼈가 타는 고뇌의 시간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단순한 육체적 죽음을 넘어 영적으로는 잠시나마 아버지 하나님과 분리되어 지옥으로 떨어지는 수난 중의 수난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니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마 26:39)”셨습니다. 기도의 자세 중에서 가장 겸손한 자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여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 앞에 내려놓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주어진 필생의 사명을 완수하려고 하는 순간입니다. 그 사명은 세상의 죄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이 잔(막 14:36)”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경에서 “잔”은 하나님이 정하신 각자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축복(시 16:5)일 수도 있고 진노(예 25:15)일 수도 있습니다. 구원(시 116:13)일 수도 있고 분노(사 51:17)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물론 예수님의 임박한 수난입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의 잔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 때에 진노의 잔을 죄인들에게 쏟아부으실 것입니다(막 10:38; 사 51: 17-23; 예 25:15-18; 눅 22:42; 요 18:11; 롬 3:25; 요일 2:2). 그런데 예수님이 죄의 대속물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은 예수님에게 대신 부어졌고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셨습니다. 죄를 지은 인류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수난의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남은 생애를 통해 마시는 잔과 당하게 될 수난 세례(막 10:38), 즉 제자들이 앞으로 겪게 될 모든 박해와 죽음은 자신들의 정화를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됩니다. 요컨대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그리고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앞둔 극심한 시련의 바다 한 가운데서 자신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4장 36절에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 14:36)

흔히들 여기 나오는 “아빠”를 한국의 어린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영어권의 아이들이 사용하는 “대디(Daddy)”와 같은 용도라는 것이죠. 그러나 “아빠(Abba)”는 아람어로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아람어는 예수님이 일상적으로 사용하시던 언어였습니다(막 14:36; 롬 8:15; 갈 4:6 참조). “아빠”라는 말은 유대인 어린이들이 자기 육신의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던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람어에서도, 헬라어에서도 “아빠”는 어른들이 자신들의 아버지를 지칭할 때도 쓰던 말입니다. 따라서 “아빠”를 어린이들만의 호칭으로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아빠 아버지여”라고 부른 것은 “아버지여, 아버지여”라고 반복하며 간절히 아버지를 찾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시험을 이기고 완전한 순종을 결단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지금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에서 자신의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심각한 시험(temptation)을 당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는 대목이 예수님의 깊은 고뇌를 말해줍니다. 십자가 수난은 예수님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을 가장 수치스럽고도 가장 참혹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 바로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는 대목이 바로 이어 나오면서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 완전한 순종의 모범을 보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끔찍한 죽음의 고통을 알면서도 자원하여, 순종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히 12:2).
예수님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벧전 2:24)”하는 십자가 수난을 받아들이면서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에 몸부림쳤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주님의 기도가 얼마나 절절한 것이었는지는 누가복음 22장 44절이 잘 말해줍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눅 22:44)

“핏방울 같이”라고 하니까 진짜 피는 떨어지지 않았고 단지 비유적 표현으로 기도의 절절함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피땀을 흘렸다는 기록이 고대에도, 현대에도 실제 있습니다.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거나 고도의 육체적 긴장 상태가 조성되면 모세혈관이 팽창하여 터짐으로써 땀과 피가 뒤섞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의학에서는 혈한증(血汗症, hematidrosis)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예수님의 정서적, 육체적 트라우마(trauma, 정신적 외상)가 얼마나 심하였는지를 잘 전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짝사랑: 잠들어 버린 제자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 26:41)”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시험”은 육신의 졸음에 굴복하는 것이고 따라서 예수님을 도와드려야 할 제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시험은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로 끌려가실 때 예수님을 부인하게 하는 유혹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마 26:31-35).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주문은 그렇게 실천하기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단순히 깨어 기도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체포하러 올 자들을 무찌르기 위하여 죽을 각오를 하자고 했다면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주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주문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순순히 잡혀 가셨습니다. 혼자서 모든 짐을 걸머지셨습니다. 물론 유월절 축제일 저녁의 피로 때문에 깨어 있기도 쉽지는 않았겠지만 결사적인 전투 준비에 비한다면 결코 들어주기 어려운 주문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버림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고 있습니다(막 14:37, 40). 오늘 본문 중 38절 하반절을 보면 예수님은 잠든 제자들의 상태에 대하여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십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생사를 같이 하고 싶었습니다. 몸으로 실천은 못하였지만 그럴 마음만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30-31절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베드로가 죽어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자 다른 모든 제자도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신의 피곤과 졸음 앞에 금방 굴복하고 맙니다. 누가복음 22장 45절은 제자들이 “슬픔으로 인하여 잠”들었다고 합니다: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눅 22:45)

예수님이 잡하시기 전날은 제자들에게도 힘든 하루였습니다. 긴 하루였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출발한 이래 연일 강행군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이래저래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지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신 그날 저녁에 제자들은 예수님과 유월절 음식을 함께 먹었습니다. 그날은 유월절 축제일이었습니다. 축제일 밤에 사람들이 피곤해지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더욱이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인기가 매우 많은 분이었고, 따라서 유월절 축제일에는 하루종일 예수님에게 몰려드는 인파로 인하여 예수님도, 제자들도 지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유월절을 먹는”(눅 22:11) 자리에서 포도주와 성찬을 받았습니다. 최후의 만찬입니다. 그래서 포만감에도 젖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도 온갖 육신의 필요와 욕망에 굴복함으로써 주님의 부르심을 쉽게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항상 좋은 의도를 가지고 믿음 생활을 잘 해나가려고 하지만 물질적 삶의 유혹 앞에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바로 제자도의 어려움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우리는 늘 보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짝사랑으로 끝나곤 합니다.
이처럼 잠에 골아떨어진 제자들의 모습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큰소리 치던 제자들의 모습과는 판이합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27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고 하셨을 때 29절에서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그러나 그 베드로도 잠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극심한 고통의 와중에도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막 16:38)

만약에 이 때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허벅지를 꼬집어서라도 잠을 물리치고 기도했더라면 예수님이 잡히시던 순간에 칼을 휘두르는 만용을 부리거나 곧 이어 도망하거나 예수님을 부인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는 저 유명한 주기도문에 나오는 대목입니다(마 6:13; 눅 11:4). 예수님의 본을 따라 삶을 살아가는 제자의 길, 즉 제자도에는 언제나 죄와 악과의 싸움이 포함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그런 힘든 상황에 처하지 않게 해달라는 뜻입니다(마 26:41). 하나님은 결코 믿는 자들을 시험하지 않으시지만(약 1:13),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 믿는 자들을 테스트하는 상황으로 이끄십니다(마 4:1; 욥 1장; 벧전 1:6; 4:12). 실제로 시험과 역경은 불가피하게 신자들의 삶에 다가옵니다. 신자들은 시험을 당하면 그것을 온전히 기뻐해야 합니다(약 1:2). 왜냐하면 우리 신자들은 시험을 통해 인내를 알게 되고 강해지기 때문입니다(약 1:3-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믿는 자들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그와 같은 시험과 역경에 빠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상황에 빠지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유혹과 고난으로 말미암아 순종 실천이 어려워지고 때로는 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반드시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시고(마 26:41; 눅 22:40; 46; 벧후 2:9; 계 3:10),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시라(시 23:3)고 기도해야 합니다.

제자도의 참담한 실패: 도망하고 부인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눅 22:41). 홀로 아버지와 대면하여 기도하기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제자들에게서 떨어지되 제자들이 자신의 기도를 들을 수도 있는 거리에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극심한 고뇌를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시자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50-5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막 14:50-52)

이 이야기는 오직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청년 제자는 누구를 말합니까?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 자신입니다. 겸손한 마음에서 자기 이름을 직접적으로 쓰지 않은 듯합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보고 칼을 꺼내 대제사장 말고의 귀를 떨어뜨렸던 베드로는 나중에 어떻게 했습니까? 마가가 벗은 몸으로 도망하였다는 이야기 조금 뒤인 66-72절에 저 유명한 베드로의 부인(否認, deneial)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새벽 닭이 울기도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제자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겟세마네 동산 기도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 기도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설교할 수 있습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교훈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지에 관한 교훈을 이끌어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구원사역의 의미를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와는 조금 달리 오늘 저는 예수 믿는 자들의 영적 성장, 즉 제자도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을 “예수님의 짝사랑 그리고 제자도”라고 붙였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반면에, 제자들은 그 사랑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짝사랑으로 끝났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성령 받고 용기를 회복하여 다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로 돌아왔습니다. 요한을 뺀 열 사도는 모두 순교하였고, 요한도 밧모 섬에 유배되는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결국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종국적 차원에서 보면 짝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겟세마네 동산 상황에서는 짝사랑입니다.
전술하였지만 제자들도 예수님과 고난을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이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셔서 대적의 손에 넘겨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칼을 빼서 휘둘렀습니다. 마가는 발가벗은 채 도망쳤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는데 마지막에는 저주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과 일부 여인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지켰을 뿐이고, 다른 모든 제자들이 결국 다 도망하였습니다. 제자도의 관점에서 보면 참담한 실패요, 극도의 미성숙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굳이 변호할 필요도 없고, 비난할 필요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숙한 제자도로 가는 과정에서 이같은 넘어짐과 자빠짐은 어떤 의미에서 필수불가결합니다. 벗은 채 도망하였던 마가도, 칼을 휘두르는 만용과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는 비굴함을 동시에 보여준 베드로도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몹시 괴롭고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런 괴로움과 부끄러움이 궁극적으로는 약재료가 되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성령 받고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되고, 또 베드로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는 전도자 겸 복음서 저자로서의 마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짝사랑으로 끝나지 않게 하려면
지금의 나에 대한 주님의 사랑도 마찬가지로 짝사랑입니다. 주님은 나를 부패와 타락의 늪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전혀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전혀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나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나같은 사람이 돌아오기를 참으로 오랫동안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인내하셨습니다. 나같은 죄인이 구원받은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은혜로 구원받고도 걸핏하면 주님을 떠나고 배신하고 주님에게서 멀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여전히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나를 짝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나와 대화하고 싶어 하시고 교제하고 싶어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그 무엇도 부족함이 없으신 주님께서 나랑 사귀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도 나는 주님과의 사귐에 최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자꾸만 엉뚱한 일에 시간과 정력을 소진합니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가장 귀한 시간인 골든 타임과 프라임 타임을 주님께 드리지 않고 기껏해야 소란하고 집중이 잘 안 되는 자투리 시간에 주님을 찾곤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주님의 사랑이 짝사랑이 되지 않도록 돌이켜야겠습니다. 먼저 내 죄를 보고 회개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주님이 쏟아부어 주신 그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감사하여야겠습니다. 셋째로 특히 오늘 본문에서 주님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실 정도로 십자가 죽음 앞에서 고뇌하신 주님의 아픔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넷째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정도로 필사적으로 기도에 매달린 끝에 완전한 순종의 결단을 하신 주님을 본받아 나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다섯째로 주님의 십자가 사역이 당장은 실패로 보였지만 결국은 죄와 사망을 이기는 위대한 구속사를 완성하는 것이 되었듯이, 오늘 저에게 맡겨진 사명이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겠습니다.
여섯째로 내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주님이 내게 가장 바라는 것은 함께 있는 것, 즉 교제인 것을 알고 날마다 가장 좋은 시간에 조용히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리고 일곱째로 주님이 마지막까지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는 것이었으니, 그 말씀에 순종하여 언제나 깨어 기도하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시험에 들지 않고 날로 날로 주님 닮아 성숙해지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열방샘교회 청년부 예배에서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 기도를 함께 묵상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죽음 앞에서 정말 겟세마네, 기름을 짜듯이 피와 땀을 짜는 기도를 하시고 마침내 완전한 순종의 결단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굽이굽이에서 맞부닥치는 위기 앞에서 상황과 문제만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땀이 핏방울 같이 흐르는 그런 간절한 기도를 하게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가장 힘드실 때 깨어 기도하지 못한 제자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 주변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을 때 기꺼이 함께 하며 깨어 기도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나를 향한 그 사랑이 결코 짝사랑으로 끝나지 않도록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는 일에 최우선순위를 두어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비록 내가 오늘 어떤 자리에 어떤 직책과 직분과 직업을 가지고 서 있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사명이라면 즐거이 최선을 다해 감당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항상 인도해 주십시오.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에 죽기까지 복종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새 생명 주신 우리 주님 예수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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