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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들어가 지켜본 사람

박성수

마 26:57~26:58, 행 2:4~0:0 본문보기

내용

20160214 “들어가 지켜본 사람” (마26:57-58/행2:4) 144/518장


아가 2:10을 보시면,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가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모습으로 그려진 사랑의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이 그려진 마태복음에서는 46절의 “일어나라 함께 가자”는 모습은 영 그런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 다음에 이어 나오는 주님의 말씀은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하는, 아주 살벌한 광경이 전개 되는 중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때, 설상가상으로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주님과 더불어 만찬석상에 앉아 다정한 시간을 가지고 있던 제자 중 한 사람! 그러나 그는 그의 스승 예수를 파는 자가 되어 그와 함께 온 자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다”고 또한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요.

49절은 그것을 아주 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49절을 보세요. (가룟 유다 그가)곧 예수께 나아와 말하기를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는(50절)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셨고 이에 유다가 데려온 사람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았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바로 이 때, 51절을 보시면,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다 하였는데, 요한복음 18:10에 의하면 이 종의 이름은 말고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말고의 귀를 내려 친 것은 시몬 베드로였고, 그는 갖고 있던 검을 빼어 대제사장 말고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 버린 것입니다.

이 순간적인 현장 모습을 마태는 예리하게 포착하여 52절에 기록된 대로 폭력에 대하여 삼가 하시는 주님의 의지적 결단을 그려 내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이 한 절 속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보여 주신 비폭력 무저항 정신이 간디와 같은 훌륭한 후대 정치인들에게도 투영되었을 것임을 넉넉히 보게 됩니다.

이내 주님 언급하신 말씀을 주목 해 보십시오. 53에,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물으십니다. 예수께서는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자 주관자이시며, 모든 천사들이라도 움직이실 수 있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권세와 권력 그리고 권리마저도 내려 놓으셨는데 그 이유를 54절에서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달라면, 그래서 저들을 모두 쓸어버린다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심입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 자신은 이 고난의 길을 걷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소명 받은 사명 수행 중이란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어쩌면 이 부분에서의 감동을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나누었는지도 모릅니다. 빌립보서 2:5-8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마태가 기록한 그의 복음서를 통해 주님의 의로우셨던 모습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제 5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하시면서 몰려 온 무리들에 대해 냉철한 자세로 상황을 평정하셨습니다.

실제로 요한은 이 상황을 요한복음 18장에서 그려 놓고 있는데, 요한복음 18:4을 보시면,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물으셨고, 이에 “나사렛 예수라” 하자 “내가 그니라” 하고 전면에 나서신 것을 보게 됩니다(요18:5) 이 때 즉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몰려든 무리들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다’ 하였습니다(요18:6). 분명히 신적 엄위하심이 저들을 제압하신 것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라 할 것입니다.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 하셨고, 예수께서는 “ 내가 그 사람이니 이 사람들(제자들)은 가게 놓아두라” 하시는 모습(요18:7-8)!

여러분은 이 모습에서 한 편의 영화 속 시나리오를 보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설교자는 전도사 시절 이 본문을 학생회 앞에서 주일에 설교하며 마치 그 당시 상황에, 그 현장에 있음과 같은 몰아적인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만, 우리 주님은 실제로 그렇게 제자들에게도 의리를 지키신 멋쟁이, 요즘 말로 하면 상남자요 훈남이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18:9을 한 번 더 보세요.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함으로써 그 현장 목격자였던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통해 오늘 우리 독자들에게 증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시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시고 본문인 마태복음을 살펴 보십시오. 마태는 그의 복음서 26:56을 통해 “이렇게 된 것은(앞서 55절의 강도 잡음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잡으러 온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함으로써, 그렇게도 의리를 지키시고 제자들을 보호하셨던 예수의 태도와는 달리 이내 같은 56절에서의 제자들의 반응을 연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오늘 제목은 그 도망간 제자들 가운데, 앞서 보신대로 용맹과 호기를 부렸던 인물 베드로를 지칭하는 내용임은 여러분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실 것으로 압니다.

실제로 57-58절 본문 속 베드로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고,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는 것이 마태의 기록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는 예수께서 재판 받으실 때, 그 현장에 있었던 증인이란 것이지요. 그런 베드로였으나, 그 자신이 성령의 체험을 하기 전 그의 모습은 유약자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침묵자였고, 도망자요 은신자이자 용기 없는 한 남자에 불과한 어부 그 자체였다는 것입니다. 사내다움과 어부로서의 전문 기술은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 모든 자기 기술과 전문성을 내려놓고 예수 위해 일사각오 할 정도의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장면을 약간 옮겨 마태복음 26:69-75을 보십시오. 그 날, 그 관정 뜰 안에 있던 베드로는, 결국 예수께서 예지예언하신대로(마26:34) 회한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함께 본 사도행전에서의 그 연약한 사내 베드로는 어떤 모습입니까?

물론 우리가 다 읽지 않았으나, 그가 행한 베드로의 설교는 宣敎史적으로도 중요하지만, 說敎辭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의 이 한 편의 설교로 예수 복음의 핵심이 다 들어 있음을 보게 되며, 그의 이 선교활동으로 인하여 당일 회개하고 구원 받은 성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宣敎役事에 해당하는 것입니다(행214-42).

그러면 그렇게까지 급반전된 원인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행2:1-13에 기록된대로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체험을 저가 확실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우리교회가 개척한 한우리선교교회를 재건하는 심정으로 하나 되어 이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 교회가 세워지는 일도 귀하고 중요한 일인데, 그 교회가 장래를 기약하지 못하고 폐쇄 직전에 다시 재건하는 사역은 또 얼마나 귀한 일일까요? 이에 장로, 권사라는 중직자를 세운 일이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를 공유한다는 것은, 우리 생애에 있어 그 어떤 중요한 일에 비교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사안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을 줄 압니다. 요는 이러한 중대사 가운데 우리는 저 베드로가 경험했던 성령의 체험을 분명히 하였는지와 지금도 그 성령의 역사하심을 민감하게 현재화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면, 주변 상황들과 같은 성도들 사이에서의 관계적인 면, 기술적인 면이나 인력, 자재, 공기 등 우리가 염두에 두고 진행해 가여 할 일들이 결코 적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응집된 최일선 과제는, 우리 모두에게 성령님의 동행 동사 하심이 있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주여 말씀 하옵소서” 하는 연초 담임 목사님의 목회 방침 또한 이런 맥락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목회적 忠心인 줄로 압니다.

바라기는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경제적인 면 등 많은 부분에서 열악함 가운데 있지만, 우리는 오늘 베드로의 성령체험 후에 급변한 놀라운 사역의 현장에서처럼, 성령님의 친권적인 역사하심 가운데 우리 교회가 나아갈 향방을 인도함 받는 역사와 이에 순응하여 각 가정과 개인이 복된 사역자로 쓰임 받는 아름다운 역사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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