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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勝利之眞判主 YAHWEH

박성수

출 17:8~17:16, 요 7:28~7:29 본문보기

내용

20160522 “勝利之眞判主 YAHWEH” (출 17:8-16/요7:28-29) 545/548장

성서 연구를 입체적이고도 통전적으로 시스템화 한 CUIN은, 설교에 있어 사전 제목 설정을 지양하고 청중들의 자발적 제목 구상을 유도하는 것이 특징 중 하나인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어찌 보면 매우 귀납법적 성서연구의 방법론을 현장 목회에서 지혜롭게 실용화 한 것으로 보이며, 우리 교회가 이를 적용할 경우 설교 전 제목 설정보다 설교 후반부에서 제목 설정을 여러분 자신이 하시게 되는 경우를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1일 세미나를 긍정적으로 참석한 이후 ‘설교제목 지양’이라는 CUIN 세미나 참석자로서 오늘의 제목 설정은 참으로 이율배반적일 뿐 아니라 다소 낯선 형식의 제목인 줄 압니다. 여러분께서도 한자와 영문 표기만으로 구성된 오늘의 제목에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나, 이는 오늘 전하고자 하는 말씀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므로 오늘 함께 보신 본문 말씀으로 통하여 왜 이런 제목이 세워졌고, 과연 이런 제목 설정도 가능하구나 하는 동감을 하신다면 그것으로 설교자는 말씀 준비에 있어 보람이 될 줄로 압니다.

모세가 후계자 여호수아와 호흡을 맞추어 가며 광야를 행진하던 시기에, 그들 앞에는 아말렉이라고 하는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저들은 ‘호전적인’, ‘계곡에 거주하는’이란 의미를 가진 족속으로써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가 그의 첩 딤나에게서 낳은 아들(창36:12)인 아말렉의 후손들입니다. 그런 아말렉 족속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르비딤에서 만나 일전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이 르비딤은, 출애굽기 17:1-7에 보시면 아시듯,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서 갈급해 할 때, 그 원성과 원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으로써 반석에서 물이 났던 곳이기도 합니다. 위기를 닥쳤을 때 저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원망 하였으나 하나님께 기도한 지도자 모세의 기도가 있었기에 문제가 해결된 모습은, 오늘날 교회 지도자가 어떠해야 할 것을 교훈 해 주고 있기도 하지만, 이런 문제 해결 다음에 또 다시 발생한 외적 문제 발생은 언제고 있을 수 있다고 하는 또 다른 각도에서의 교훈도 갖게 해 줍니다.

우선 식수 문제를 해결함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지만, 저들은 아말렉이라는 또 하나의 변수 앞에서 다시 한 번 응집해야 했습니다. 바로 이 선봉에 선 것이 여호수아였는데, 오늘 본문 9절을 보시면,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함으로써 당면 문제의 해결선상에 후계자 여호수아를 세우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한 공동번역 성서의 해석은, “장정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는 것이었고, 이것은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내린 ‘명령’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의 전후 내용은 독자이신 성도들은 웬만하면 다 아는 내용이기에 따로 언급은 않습니다. 다만 13-14절을 보시면, 아말렉을 전멸시킨 후 하나님께서는 이 전승사를 책에 기록할 뿐 아니라 “그 내용을 여호수아로 하여금 귀에 외워 들리라” 라고 까지 지시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를 수용하고 기념이라도 하듯 모세는 15절을 보시면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닛시’라는 용어는 ‘깃발’이라는 의미로써 ‘승리’의 깃발‘을 의미합니다. 즉 모세가 勝戰케 하신 하나님 앞에 재단을 쌓고 ’닛시‘라 칭함은, “이 전쟁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공동번역 해석은 이렇습니다.

15. 모세는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야훼 니씨라고 이름을 붙이고 16. "야훼의 사령기
를 향해 손을 들자. 야훼께서 대대로 아말렉과 싸워주시리라." 하고 외쳤다.

과연 전쟁의 최종 공로를 하나님께로 돌리는 지도자 모세의 영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10-13절을 보시면, 그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전언 드린 대로 여러분 자신이 잘 아시는 내용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승리의 하나님’이신 것을 여러분 자신이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유에서 오늘 제목은, 그 승리의 하나님 즉 승리하게 하시는 야훼 하나님은 또 다른 면에서 어떤 분이신가를 예수님의 모습에서 대비해 보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제 여러분의 시선을 저 모세 시대에서 확 돌리셔서 예수시대로 전환 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나 여호수아가 저 광야에서 투박하게 싸움을 치렀다면, 예수께서는 지금 당시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 그것도 성전에서의 절정에 이른 사역 중에 있었던 일이 바로 요한복음 7장의 오늘 본문 삼은 내용입니다.

분명 요한복음 7:1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유대에서 다니지 않으셨고 갈릴리에서 다니셨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죽이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요7:4)” 하는 그 형제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여 주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 때가 아직 차지 않았다(8절)” 하시고는 갈릴리에 머무신 것이 보입니다. 그런 예수셨지만, 10절 이후를 보시면 은밀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명절은, ‘초막절’이라는 아주 분주한 시기였지요(요7:2).

정리하자면, 요한복음 7:10 이후 오늘의 본문 7장 그리고 최소한 8장까지는 전언된대로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 그것도 성전 근처에서의 사역 내용이란 것이 확실시 됩니다. 이 시기에 주께서 하신 말씀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가 되며, 그것은 곧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정체성’ 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은 참되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진리이시다, 하나님은 온전하시고 완전하시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 말씀을 하신 예수는, 자신의 사역과 이 세상에서의 사역의 동기가 자의에 의함이 아닌 하나님의 파송에 있었다는 강한 정체성을 appeal 하고 있습니다. 즉 “나는 내 뜻으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요7:28, 8:42)” 하는 것이었습니다. 要는, 그렇게 자신을 보내신 분이신 하나님은 ‘’참‘되신 분이며, 그 분은 요8:44에서처럼 거짓의 아비이자 살인자였던 마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진리‘ 그 자체이심을 역설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정체성’ 가운데 또 하나는, ‘하나님은 심판자시다’하는 것입니다. 요8:49-51절을 보십시오. 특히 50절(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개역개정)에 의하면 “나를 위해 영광을 구하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심판자이시다” 하는 선언적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우리말 번역 참고). 물론 여기서 ‘그분’은 야훼 하나님이신 것을 여러분은 익히 잘 알고 계십니다.

여기서 잠깐 ‘YAHWEH’가 ‘야훼(야웨)’ 혹은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는 또 다른 ‘유일신에 대한 호칭’ 용어라는 점은 주지하는 바와 같으며, 이에 대한 신학적 해설은 오늘은 논외로 합니다.

이제까지의 말씀들을 정리해 봅니다.

첫째, 여호와 하나님은 승리의 깃발이시다.
둘째, 여호와 하나님은 참되시다.
셋째, 여호와 하나님은 심판자가 되신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심판자‘라는 해석에 주목합니다.

‘심판자’에서 ‘者’字는 ‘놈 자’字로써, ‘놈’, ‘사람’, ‘일’, ‘물건’ 등을 지칭합니다. 의존명사로 사용된다 할지라도 사람을 얕잡아 볼 때 전용되는 용어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심판의 최고위로 놓을 경우, 우리는 그 하나님을 심판자라 하는 표현이 옳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이를 구별하여 審判主로 칭한다면, 이는 다소 순리적이어 보일 뿐 아니라 그런 맥락에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심판자가 아닌 ‘심판주’로 칭하여 ‘참된 심판주로서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근거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位格을 각각의 독립적 역할로 구분하여 정의한다 할지라도 근원적으로 하나님은 이 세 위격이 하나이신 일체의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이를 알게 하신 분이 ‘성령’이심을 다시 한 번 되돌아봅니다. 마치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이르신 주님의 말씀처럼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음처럼, 그 신비에 속한 구속사건의 정점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음을 우리는 오늘 다시 한 번 발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당신 속에 거하십니까? 당신은 성령 받으셨나요? 당신은 성령충만 하신가요? ‘최후 승리의 참되신 심판주 하나님’의 영 곧 보혜사라 하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우리는 ‘믿음과 확신에 거하는 삶의 용장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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