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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육욕의 장막, 증거의 장막

박성수

행 7:49~7:53 본문보기

내용

20160626 “육욕의 장막, 증거의 장막” 행7:49-53 204/459장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우리 다같이 다음 말씀을 함께 암송 해 보십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 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예. 다름 아닌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고하였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오늘, 우리 시대에, 우리에게 이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또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매 시간 시각마다 우리는 모든 일에 기뻐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이 말씀의 의의는, always 즉 항상, 매 순간, 매 상황들 속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으면 기뻐할 수 있는 상황으로의 반전이 있다는 하나님의 코치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늘 기뻐 할 줄 아는 자는 비로소 쉼 없이 기도하는 삶을 통해 그 기쁨을 잃지 않게 되겠지요. 따라서 성도가 쉬지 않고 기도 한다는 것은 또한 감사의 조건을 늘 곁에 두고 산다 함이니, 결국 ‘성도가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이란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마치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우리에게 임재하심 같이 ‘동시적이자 하나의 찰라적인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HMEHC 성도 여러분의 삶은 이같이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삶’이 ‘일상’이 되시기를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설교자는 설교자의 자녀들이 매우 어렸을 때, 여주성결교회서 사역 시기에, 이 말씀으로 큰 덕을 보았던 경험이 있답니다.

당시 제법 아끼던 예쁜 유리그릇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자녀 중에 누군가가 실수로 이를 깨트렸고, 이내 그릇은 산산조각 났지요. 지금도 설교자는, 불같은 성질이 남은 부분 있습니다만, 당시로선 더하였던 터라 제 스스로 보아도 분명 엄청나게 화를 내었어야 할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앞서 함께 나눈 말씀을 적용하여 이런 노래가 입에서 나오더군요. “깨진 그릇 더 이상 붙일 수 없고 가는 세월 더 이상 잡을 수 없네 한 번 왔다 가는 세상 방황치 말고 부르실 때 할렐루야 찬송 부르세” 그리고는 그 뒤 끝에 “항상 조심하라 쉬지 말고 조심하라 범사에 조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아빠의 훈계니라!” 하니, 곡조에 맞추어서 어느 샌가 노래가 되었고 그 끝에 말씀을 응용한 교훈이 되고 보니 머쓱해진 자녀들도 이내 웃음바다가 되었던 적이 있답니다. 결국 한 자녀는 울음보를 터트렸고 가정은 또 하나의 부흥회 분위기였던 것이 기억납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장막이란 곧, 사람이 거하는 곳, 가족이 머무는 곳, 인생이 이 세상에 육신으로 머물면서 衣食住의 세 가지 인간생활의 근본 요소 중 住宅과 관련된 용어가 이 단어입니다. 즉 ‘장막’은, ‘사람이 머물면서 기본적인 일상을 영위해 갈 기본적인 공간’이자 ‘임시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지난 주일에 사역을 위한 보궐선거로써 맛디아가 열 두 사도에 채워진 과정을 말씀 드렸습니다(행1:15-26). 그런데 그 뒤를 이어 보시면 사도행전 안에서는 사도들의 구체적인 활동이 소개 되어 있고(행2-4장) 특별히 5장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불충과 사도들의 능력 사역 및 능욕 받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 6장에서는 일곱 집사를 선택하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 6장에서는 스데반 집사가 특별히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민간에 기사와 표적을 행하다가(행6:8) 공회에 잡힌 장면이 나옵니다. 이 대 스데반 집사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행6:15) 하는 것은 사도행전과 스데반 집사를 아시는 분이라면 모두가 잘 아는 부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공회에서 대제사장은 스데반에게 예수 복음 증거를 전함을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한다고 거짓 증거 한 거짓 증인들의 말(행6:13)이 사실인가를 심문 하는 장면이 사도행전 7:1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위증자들을 세워 위증하게 해 놓고는 그 위증이 사실이냐고 스데반의 면전에서 심정을 상하게 하는, 아주 비열하고도 세밀한 음모를 구사하고 있는 장면인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상황 하에서 스데반 집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삭, 야곱, 요셉 가정을 통한 하나님의 正統 役事歷을 면밀히 피력합니다. 그리고는 요셉 이후 고난 중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기 위해 세우신 모세와 그 모세를 통해 주신 律法의 歷史를 또한 정통하게 언급하면서, 그러한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지도력을 거절하며(행7:39) 심지어는 우상을 만들어 거기에 제사하던(행7:41) 유대인들의 조상적 이야기를 정확히 회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을 외면하셨는데(행7:42), 그것은 저들이 가나안 땅을 향해 인도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와는 무관히 저들의 장막을 육욕의 장막화 한데 그 이유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7:43에 기록된 아모스 5:25 말씀의 인용구인 몰록의 장막과 레판의 별이란, 이스라엘 백성들 즉 스데반이 언급한 당시 제사장들이나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절하고자 만든 형상 즉 우상이었고, 이는 하나님의 계명에 정면적인 도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를 매우 싫어하셨고 그것은 지금도 그러함을 우리 성도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혹여라도 우리 시대에 우리의 가정에 신과 같이 떠받드는 그 어떤 유형, 무형의 형상이나 사상 혹은 가치관들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리 시대의 우상이란 점을 다시 한 번 근신하여 마음에 새기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집중할 일입니다.

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만들고 섬기며 거기에 절할까요?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우선 보이고 대리 만족을 할 수 있기에 자기 좋아서 자기 잘난 맛에 자신이 만든 대상화된 사물이나 사상을 신격화 하는 그것이 곧 육욕을 충족하려는 작태이며, 그 장막이 곧 육욕의 장막인 것입니다.

지금 온 지구적으로 정신 못차리고 우왕좌왕하는 동성애 문제는, 그런 면에서 정상적이고 건강한 異性愛, 하나님 주신 신성한 性愛를, 변형되고 변질된 肉情의 늪에서 자기 합리화 하는 세력들이 커지는데 대해 바르게 다스리고 치리하지 못하고 연약한 人性에 매여 가볍게 다룬 결과에 다름 없는 노릇이니, 오호통재라 지금이야말로 우리 성도들은 이를 하나님께 고하고 용서를 구할 뿐 아니라 철저히 자신을 지켜 정욕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에서 이탈함 없도록 지켜가야 할 소중한 시기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본문 속에서 스데반 집사는 이러한 육욕의 장막에 거하던 조상들 가운데 그래도 지도자 모세를 따르며 그에게 부여된 증거의 장막 곧 하나님의 명하신 양식대로 지은 성전이 솔로몬 시대에 지어진 것을 다행스레 여기며 47절에 보시는 바와 같이 성전 완공의 역사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성전이란 곧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의 양식을 따라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성별되게 살아갈 하늘 장막의 예표로 imitation삼은 것임이 분명해 진 셈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스데반 집사는 이 거룩하게 지어진 솔로몬의 성전마저도 하나님의 거하실 공간이 되기에는 미진微塵하고 미약微弱하여 당신의 안식할 처소는 되지 못함을 이사야 선지자를 인용하여 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 모든 건축물도 사실은 조물주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고 되묻고 있습니다(행7:49-50). 한 발 더 나아가 스데반 집사는, 51-53절의 말씀을 통해 당시 공회에 모인 스데반 집사에의 고발자들에 대해 통렬한 직언을 고하였으니, 결국 바로 그 바른 말에 의해 마음에 찔려 이를 갈았다 하였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7:54의 내용입니다.

설상가상 격으로, 55-56을 보시면 기막힌 모습이 연출되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55절).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이쯤되니 이를 갈고 부들부들 떨며 스데반 죽이기를 기회만 보던 그들이 어떻게 했을까요? 57-59절을 보시면 여러분이 보시는대로 스데반 집사를 신약 교회사의 최초 순교자로 만든 내용이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殉敎史와 더불어 등장한 사울이 이어 등장하는 교회 박해사의 주인공이자 바울로 이름을 바꾼 사도행전 8-9장에 바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를 그리고 우리 가정을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우리 교회의 공정률은 대략 50% 내외가 된 듯 합니다. 여러분이나 본 설교자의 자택도 나름 훌륭하게 거할 처소가 되구요. 요는, 우리의 각 가정이든 새로 건축하는 우리 예배당이든, 하나님을 향한 온전하고도 성결한 율례와 말씀 안에서의 거룩함이 상실되고 우리 자신의 육욕이 선행되어 하나님의 뜻과 무관히 自行自止하고 살아간다면, 그 자체로써 우리는 증거의 장막 곧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장막이 아닌 육욕의 장막 즉 하나님과는 무관한 자기 우상 숭배의 장막으로 마무리 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고, 그 육신의 장막을 친히 깨뜨리시사 보혈의 피를 흘려 구원을 완성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도 전무한, 자기 기만, 자기 만족에 다름 없다는 사실입니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이 이제 어느새 저물고 있습니다. 6.25 전쟁을 하나의 전설로, 스토리로만 접하고 있는 전후 세대의 설교자로서는 이에 대해 무어라 감회를 피력하기도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늘과 땅을 조성하시고 친히 온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엄존하심을 무시하고, 온 인류와 더불어 화해와 화평으로 살아가야 할 지구촌의 삶을 도외시 한 체, 온갖 사상과 물질과 완력을 ‘자기 존재 과시’와 ‘자기 숭배의 총아寵兒’ 삼는 ‘변형된 동포 세상’에 대해서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선긋기와 경계 태세 완비가 분명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에 유념하면서, 성도 여러분 각자가 ‘구원에 합당한 삶’은 물론이거니와 ‘애국애족에도 남다른 忠愛로써 平時를 완주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안위와 안보하심이 여러분의 시마다 때마다 변함 없이 함께 하옵시기를 간곡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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