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서 156] 꼭 안 해도 되는 일
오제신 (장로. 무등산공유재단 이사) l 등록일:2013-01-02 09:39:52 l 수정일:2013-01-02 17:58:11
무엇을 만들거나 이루기 위해서 몸이나 머리를 써서 하는 인간의 제반 활동, 또는 그 대상을 사전에서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산다는 것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 아이에게는 놀이가 일이고 학생에게는 공부가 일이고, 군인에게는 훈련과 나라 지키는 것이 일이다. 생활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노동이 일이고, 정치가에게는 정치가, 선생에게는 교육이, 목회자에는 목양이 일이다.
일과 직업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생계를 위해서 하는 일, 즉 직업의 종류는 분류 방법에 따라 수만 개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직업 전선에서 떠난 은퇴한 노인들의 일은 무엇일까? 쉬는 것이 노인의 일이라고 냉소적으로 내뱉을 수도 있지만, 긍정적인 답변은 ‘후배와 후손을 위해 지혜와 경륜을 전해 주며 바람직한 삶의 모델을 제시해주는 것’이 노인의 일일 것이다.
직업의 호불호를 떠나서, 할 수 없더라도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도 있다. 해서는 안 될 일이란 범법 행위나 남을 해롭게 하는 일, 또는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위 들이다. 이러한 일은 남에게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
육신의 건강을 해치는 일이나 영혼을 피폐케 하는 일,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훼손하거나 자원을 낭비하는 일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내 돈, 내 몸,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쓰는데 무슨 소리냐? 하면서 탐욕과 오만, 만용과 허비, 황음, 방탕, 만행, 냉소, 부정의 삶으로 시간을 죽이는 것 또한 사람의 일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내가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있다. 세상을 살면서 진정한 마음으로 하는 모든 선한 일이 그렇다. 상대(이웃)가 있는 일뿐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일도 있다. 책을 보거나 기도하거나 명상에 잠기는 일, 편지를 보내거나 일기를 쓰는 일 들이다.
남을 훼방하지 않고 스스로 즐기는 일, 즉 취미생활도 꼭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나는 아침 새벽기도에서 돌아오면 일기를 쓴다. 맑은 정신으로 어제를 차분하게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오늘을 실체적으로 계획하기 위해서다. 일기를 씀으로 나는 하루하루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감사하며 또 새날을 풍성하게 살겠다고 다짐한다. 세월이 너무 빠르거나 헛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일기 쓰기를 권하고 싶다. 일기로 되돌아보는 시간만큼 삶이 풍성해질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다. 하루 10 페이지, 일 년에 두 번 통독할 수 있는 분량이다. 그 다음 육신의 건강과 가벼운 몸으로의 질서 있는 일상을 위해 커피물 관장을 한다. 그리고 나면 아침 배가 오고 출타하는 분이 있으면 선착장에 나가 배웅해 드린다. 하지 않아도 되지만 나의 노년을 더욱 풍성케 하고, 내 뒤를 따르는 자녀들과 이웃에 디딤돌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한 나의 방편이다.
8시가 되면 아내가 식사 준비가 다 됐다고 종을 친다. 식사를 하면서부터는 그날 하루 해야 할 일을 시작한다. 창고에 들어가 연장을 들기도 하고, 꽃봉오리가 맺힌 비파와 매실나무 밭으로 향하기도 한다. 오늘은 닭장에 올라가 매실나무 비료로 쓸 닭똥은 모아 말리고, 보일러 버너를 소제하고, 오후에는 매실 밭으로 삐져 들어오는 대나무 뿌리를 캐낼 것이다. 오늘 꼭 해야 할 일, 즉 내 밥값으로 해야 할 일을 계획한 대로 진행할 것이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기 전에 이메일을 확인한다. 지난해 가을 은퇴한 친구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석 달 전, 은퇴 후 장애인 복지기관에서 자원 봉사를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하는 훈련을 받는다고 하던 친구다.
지금은 외국인과 다문화인을 위한 또다른 봉사 활동을 준비하고 있단다. 한국어 교사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뒤늦게 밤을 새워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다방면으로 지식과 경륜이 풍부한 내 친구에게 한글을 배우는 이들은 행운아일 것이다. 친구의 열정과 철학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래도 나이 들어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사서 하는 친구가 자랑스럽다.
나이가 들고 현장 일터에서 떠나게 되니 꼭 해야 하는 일의 성격이 달라졌다. 세상에서의 성취나 사람들의 인정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꼭 안 해도 되는 일, 한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 일, 수고에 대한 급부가 있는 것도 아닌 일, 바로 그 일이 이제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 됐다. 이제부터 내가 더욱 중점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계사년 새해 아침의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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